「인지」후의 세계 키신저는 말한다|불 렉스프레스지 샐린저 기자(고「케네디」대통령공보비서)와의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인지·중동 동 세계주요지역에서 미국외교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은 지금 그 주역「헨리·A·키신저」미 국무장관은 미 외교를 어떻게 평가·반성하고 있을까. 다음은 프랑스 주간지「렉스프레스」에 실린 고「케네디」전대통령의 공사비서관으로 현재 동지 기자로 있는 「피에르·샐린저」씨의「키신저」회견기사. 본사「파리」주재 주섭일 특파원이 간추려 보내 온 것이다. <편집자 주>
샐린저=귀하는 항상 자신을 정치가가 아니고 역사가라고 말해 왔는데 69년 이래의 미국외교정책을 역사가 적 입장에서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키신저=69년 내가「닉슨」이 정부에 참여했을 때는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미국을 둘러싼 세계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서구와 일본은 경제력과 확고한 정치체제를 회복했다. 냉전의 단순한 선택이론은 빛을 잃기 시작했고 모든 나라에서 국제긴장을 종식시키라는 압력이 높아가고 있었다.
미국외교는 도덕지상주의에서 실용주의로 변모하고, 힘에 의한 정책으로부터 힙을 포기하는 정책으로 옮아갔다. 이것이 우리가 설정한 목적이었다.
우리는 공산세계의 다극화 현상을 충분히 고려하고 또 이용했다. 데탕트에 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월남에서 철 병을 단행했다.
지금 전국적인 의견통일이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월남전이 끝나고 3개월만에 아무도 예기치 않은「워터게이트」사건이 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행정부의 권위를 실추시켜 외교는 더욱 어려워지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은 의회주도하에 행해지게 됐다.
「케네디」이후 일군의 수재들이 미국외교를 맡아 왔다. 그들은 여론에 대해 영향력을 가졌고 대통령도 그들을 신뢰하여 지난15년 동안 그 직무에 관련되어 해임된 예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가 매일 여론의 공세 앞에 무장해제 돼 있으니 이것은 종전후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문=최근의 여론조사결과는 미 국민의 고립주의가 뿌리 깊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답=사실 그렇다. 그것은「워터게이트」사건으로 출발된 정치거부 반응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정치체제전반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조사는 미 국민은 현대의 외교정책에 대해 70%가 지지하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따라서 국민은 외교정책보다는 정부의 기능 전체에 환멸을 느끼는 것 같다.
문=지금으로부터 5년간의 미국 대외정책의 향방에 대해서….
답=가장 좋은 각본이라면 미국의 대 일본 및「유럽」관계가 기능적인 단계까지 강화되고 「화해」기운이 강대국간의 전술이 아니라 작업방법이 되고, 대 중공 관계가 정상화의 방향으로 진전되며 마지막으로 제3세계와의 관계가 대결-협력의「딜레마」로부터 탈피하는 것일 것이다.
반대로 최악의 각본은 우방들의 내부안정이 서서히 붕괴되거나 미국이 자신을 잃어 무력하게 느껴지는 경우 일 것이다. 이 두개의 각본은 다 가능하다. 우리는 최선의 각본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의 새로운「이니셔티브」에 의해 도약으로 향할 수 있는 어려운 시기 가운데 한 시기를 쉽게 넘길 수 있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나는 6개월 전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다. 당시 나는 홀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기를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다.
내가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던 작년 10월(미군의 중동개입 발설시기)보다 전망이 좋다고 생각한다.
문=5년간「캄보디아」를 이용한 후 포기했던 사실에 대해….
답=「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사실은 가슴을 찢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캄보디아」전쟁에 충분히 손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사실 우리는 6만여 명의 월맹군이 있었기 때문에「캄보디아」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1만5천명의 월맹군을 포로로 잡았고 2만여t의 전쟁물자를 노획했었다.
그후 우리의 손실은 1주일에 1백 명에서 50명으로 줄어졌고 나중에는 10명으로 줄어들었다.
우리의「캄보디아」작전은「사이공」의 3∼4개 지역과「메콩·델터」지역에서 예상되던 월맹군의 공세를 막았다.
우리는 월남주둔 미군의 철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를 수행했던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캄보디아」작전은 하나의 성공이었다.
우리는 그후 몇 달만에「캄보디아」작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나날들에서 우리들이 물자를 보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나는 이점에 대해 자만하지 않는다.
문=73년「파리」협정 후 귀하가 월남과「캄보디아」에 대한 정치적 처리를 위해 노력했더라면 지금의 사태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답=군사계획상의 균형 없이 정치적 해결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나는 알게 됐다. 한 예로 73년 여름 우리는 캄보디아의 정치적 합의에 전혀 접근하지 못했었다. 이 희망은 폭격이란 수단을 이상 더 갖게 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정치적 합의를 갖고 폭격중단과 교환할 가능성을 잃었던 것이다.
월맹에 대해서 나는 월맹이 군사적으로 정복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협상에 동의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대진전이 월맹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이제 하나의 정치적 추리의 장애는 후퇴하고 말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