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말레이시아 국왕주치의 최정선 여사(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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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쿠알라룸푸르=전 육 특파원】최 여사가「나시루딘」국왕의 이비인후과 주치의로 발탁된 것은 지난 66년.「나시루딘」왕은 당시 국왕과 출신주인「트링가노」주의 주왕을 경직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국왕선임제고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다른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13개 주 1개 자치정부로 구성된 이 나라는 각주마다 왕족이 있고 각 왕족가문은 저마다 마로 주 왕을 뽑는다.
여기에서 선출된 주 왕들은「주왕 회의」를 소집, 상임 왕 5명을 투표로써 선출하고가 5명의 상임 왕이 5년 임기로 교대로 국왕에 책봉된다. 중임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중환자 수술 성공하자 신임>
이 같은 주왕 제고는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진 것으로서 중앙정부에 대한 실권은 없지만 상징적인 존재로서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는 존경심은 대단하다.
이 같은 절차를 거쳐 뽑힌「나시루딘」국왕은 재위 중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기도 했다. 탁월한 외교가 였던 그는 신생독립국「말레이시아」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역대 어느 왕보다도 공헌이 컸다.
최 여사가「나시루딘」왕에게 소개되어 간 것은 경말 뜻밖의 일이었다. 시골병원에서 「쿠알라름푸르」의「제너럴·호스피틀」이비인후과로 옮겨온 그녀는 그저 묵묵히 일이나 하는 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루는 최 여사에게 원장으로부터 곧 죽을지도 모르는 중환자의 수술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 여사의 경험에 비추어 수술 받을 환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10%도 되지 않았다. 수술을 할 때면 항상 고민이 따르지만 그날처럼 최 여사가 고심 참담해 본 적은 없었다.『환자가 죽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다』는 확답을 원장으로부터 받은 그녀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수술을 했다.
다행히 환자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날 목숨을 건진 사람도 바로「말레이시아」대법관이자 병원장의 친구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병원장은 이비인후과의 중요수술은 모두 최 여사에게 맡겼다. 병원장은 최 여사의 성실성을 전폭적으로 신뢰, 일일이 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내규를 째고 그녀에게만은 수술의 재량권을 주었다.
최 여사를「나시루딘」국왕에게 소개한 사람도 바로 이 병원장이었다. 병원장 자신이 국왕의 내과 주치의 일을 맡고 있어 왕실출입이 잦던 터에 국왕이 귓병이 났다. 병원장은 대뜸 최 여사에게 간호원 한 명을 붙여 주며 국왕에게 왕진 갈 것을 권했다. 마침 서울을 방문한 직후여서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던「나시루딘」왕은 최 여사를 반갑게 맞으며 계속 자기의 귓병을 치료해 줄 것을 정중히 부탁해 왔다.
이로부터 최 여사는 국왕의 병세여부와는 관계없이 한 달에 두 번씩 왕실을 방문, 왕비·왕자 등의 이비인후과 경기검진을 했다. 왕족들은 모두 최 여사의 예의바르고 상냥함에 호감을 가져 그녀를 단순히 의사로 대하지 않았다. 왕은 사흘이 멀다 않고 열리는 왕실주최연회에 그녀를 초청,「말레이시아」외교사절들과 상류사회인사들에게 일일이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 여사는 40여명의 거물급 단골환자들을 확보, 이들로부터 받는 유형무형의 편의가 그녀를 10년 동안「말레이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연 1회 고국방문이 큰 즐거움>
지난72년 퇴위하고「트링가노」의 주 왕으로 돌아간「나시루딘」왕은 최 여사에게 영주권을 줄 테니 함께 그곳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딸 은주 양(16·영국고교유학)의 교육과 부군 오세환씨(무역업)의 사업 때문에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명하자 왕은 오씨에게「트링가노」주 개발사업의 프로젝트 하나를 줄 테니 가자고 졸랐다.
최 여사는 끝내 동행을 어렵게 거절했다. 비록 조건이 좋다 하더라도 최 여사 가족으로서는 동료한국인의사들이 살고 있는「쿠알라룸푸르」를 선뜻 떠날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나시루딘」왕은 크리스마스·새해를 맞으면 손수 카드를 보내 오고 간혹 특산물을 선물로 부쳐 온다. 최 여사 가족도 휴가 때만 되면 서울을 방문하는 기간 외에는 「트링가노」를 찾는다.

<영연방 전문의 면허도 받아>
마침 부군 오씨의 사업이 점차 본궤도에 오르고 있어 최 여사는 더욱더「트링가노」로 이사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 여사는 남편의 사업에도 큰 내조를 하고 있다. 자본력이 약한 남편의 현지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준 것도 정부고관을 소개해 절차상 편의를 알선한 것도 최 여사의 사고력이 크게 작용했다.
가끔「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해 최 여사의 쇼핑 안내를 받는 한국인이면 최 여사가 뿌린 인정의 씨앗들이 얼마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나 를 실감한다. 그녀 자신도 강조해 설명하다시피『이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형편』으로 그녀는 모든 생활의 편의를 만끽하고 있다. 영연방 전문의 면허까지 얻은 그녀는「쿠알라룸푸르」시내 고급주택가 1천여 평 대지의 저택에서 노모와 남편, 세·식구와 살고 있는데 방학 때 런던 에 유학중인 딸이 오면 함께 1년에 한 번씩 고국을 방문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이대의대 1회 졸업생인 최 여사는「말레이시아」에 오기 전 서울에서는 영등포 시립병원 이비인후과 과장 겸「동창병원」이란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몇 년 전 같은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동료 의사가 밤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 시체를「앰뷸런스」에 싣 고와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산소호흡기 통에 30분이나 넣었다가 이 사실을 안 병원장으로부터 호된 책임추궁을 당했던 기억과 북괴대사관이 생긴 후부터 얼굴이 익지 않은 한국인을 만나면 비실비실 피해야 하는 서글픔을 재외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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