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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 자살 충동 … 아이 유산 가정 파괴하는 ‘그놈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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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OO씨죠? 저는 대검찰청 △△△ 검사입니다.” 김모(33·여)씨의 휴대전화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지난해 9월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김씨는 “검사”라는 말에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다.

 “도박 사이트 수사를 하다 선생님 이름으로 된 대포통장 거래 내역이 발견됐거든요.”

 범죄에 연루됐다는 말에 김씨는 겁에 질렸다. 임신 3개월차인 몸은 긴장감에 얼어붙었다. “일단 은행·계좌번호·보안카드 번호부터 불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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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라는 사람은 다그치듯 김씨를 몰아쳤다. 그는 엉겹결에 은행 정보를 불러줬다. 그 직후 전화는 끊겼다.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의심이 든 김씨는 곧장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을 확인했다. 통장에는 전세 대금으로 마련해 놓은 6700만원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잔고는 2000만원이 전부였다. 전화를 받는 동안 4700만원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돈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 목소리’는 김씨의 가정을 산산조각냈다.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김씨는 다음 날 유산 수술을 받았다. 김씨는 현재도 우울증 치료를 받을 정도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다.

 보이스피싱을 겪은 피해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른바 ‘보이스피싱 트라우마’다. 경찰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모두 3만7000여 건이다. 소액 피해까지 포함하면 실제 피해자는 4만~5만 명에 이르고 금전 피해를 당하지 않더라도 공포·스트레스 등 정신적 피해를 겪은 사람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본지 취재진은 보이스피싱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 1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대부분 보이스피싱으로 1000만원 이상의 금액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대다수가 낯선 전화가 걸려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불면증·우울증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주부 김모(40)씨는 보이스피싱 이후 극심한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지난해 4월 저축은행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었다. 범인은 대출 편의를 봐주겠다며 두 달간 30여 차례에 걸쳐 선이자 등의 명목으로 9300만원을 가로챘다. 김씨는 사건 이후 1년이 다 되도록 밤마다 보이스피싱 목소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자신의 스마트폰에 보이스피싱 방지용 애플리케이션을 7개나 깔아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보안 앱을 아무리 설치해도 불안감이 가라앉지 않는다”며 “조울증이 심해져 가족들에게 짜증내는 일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박모(40·여)씨도 보이스피싱에 당한 뒤 심각한 불면증을 겪고 있다. 박씨는 지난달 21일 “남편을 납치했고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급해진 박씨는 1200만원을 보냈다. 하지만 이는 보이스피싱 사기로 드러났다. 박씨는 사건 직후 “손가락을 자른다”는 환청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

 지식이 많은 전문직도 예외가 아니다. 의사 A씨(여)는 지난달 경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속아 1억원가량을 빼앗겼다. 범인은 “금융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조치해 줄 테니 계좌번호·비밀번호를 입력하라”며 가짜로 만든 경찰청 홈페이지 주소를 불러줬다. 이를 진짜 경찰청 홈페이지로 착각한 B씨가 계좌번호 등을 입력하자 범인은 B씨의 계좌에서 1억2000만원을 인출했다. 변호사인 A씨의 남편은 “아내가 보이스피싱 이후 자살하고 싶다고 자주 말한다”고 전했다.

 금전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정신적 충격은 마찬가지다. 지난달 6일 오후 3시쯤 박모(46·여)씨는 중학생인 아들의 번호로 “아들을 데리고 있으니 2000만원을 보내지 않으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경찰에 의해 아들 소재가 파악돼 입금을 하진 않았지만 ‘워킹맘’인 박씨는 사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직장을 조퇴하기도 했다.

 국립서울병원 임선진 정신과 전문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자녀 납치 등 강압적인 협박에 극도의 공포감을 체험하게 된다”며 “공포감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경우 정상 생활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서 ‘왜 바보같이 당했냐’고 질타할 경우 정신적 충격이 악화될 수 있으니 절대 피해야 하며, 병원 상담을 받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상화·최종권 기자

◆트라우마(trauma)=재난·범죄 등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비슷한 상황이 됐을 때 불안해지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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