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스페인 문단의 한국시인 민용태씨(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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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페인」처럼 시인 많고 시를 좋아하는 백성도 드물 것이다. 웬만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외면하지 않는다. 아무하고나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민씨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를 아는 몇몇 「스페인」인들이 평을 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들의 의견은 대개 몇 가지 점에서 공통된다. 첫째 그의 시가 난해했다고 말한다. 이 난해란 말을 그들은 현대시의 난해성과 결부시키면서 그러면서도 감정적으로 이해되는 점이 많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동창인 부인도 미술사 전공>
그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어떤 청년은 민씨의 시에서 「파블로·네루다」「스타일」의 고통과 저항의식을 느꼈다며 서양적인 것에 대한 적응의 자세가 엿보인다고 말한다.
민씨가 시를 쓰며 미흡하게 여기는게 있다면 시상을 가다듬는다든가, 시를 쓸 시간적인 여유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한밤중 학위논문준비와 생계를 위한 일과가 끝난 뒤 작업의 소산이다. 시인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시작은 그의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마드리드」생활 6년이래 씨름중인 비교문학연구였다. 「마드리드」대학 「스페인」문학과 주임교수 「프란시스코·인두라인」교수의 지도로 작성 중이던 박사논문준비도 73년 말 매듭지었다. 지금 예정대로라면 오는 가을 학기부터 「마드리드」대학에서 비교문학강좌도 맡도록 되어있다.
유학생으로 젊은 부부가 「스페인」에 온지 6년째, 이제야 가까스로 숨돌릴 여유가 마련됐다. 외국어대학 「스페인」어과 동창생인 민씨 부부는 대학을 졸업하던 68년 결혼, 같은 해 연말 「마드리드」에 와서 따로따로 기숙사생활을 하며 공부했다.
부인 김수희씨(29)는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어 현재 석사논문을 준비중이다.
낮에는 부부가 함께 사립「미라시에라」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한다. 학교 근무가 끝나면 민씨는 오후에 체육관에 나가 매일 2시간씩 태권도 교습으로 생활비를 보탠다.
학생으로서의 공부도 끝나고 어느 정도 생활기반도 잡혀가고 있는 민씨는 여지껏 쫓기다시피 해온 생활을 정리하고 이제부터 짜임새 있는 앞으로의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참이다.
지금까지 공부해온 비교문학은 대학연구실에 남아 계속해가면서 「마드리드」에 동양문화소개기관을 설립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미 사업계획을 완성, 연구소건물까지 건립중인 민씨의 이 계획은 「스페인」의 젊은 사업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있다.
동양문화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이 기관은 좀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한국어를 비롯, 중국어·일본어 교육과정을 주축으로 한 이 연구소에서 유도와 태권도보급까지 하겠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연구소 운영자금의 일부를 충당하겠다는 계획이다.
민씨는 금년 안으로 동양문화원이 문을 열게 되면 앞으로 2∼3년 안에 튼튼한 기반을 잡게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대학의 지도교수들로부터 운영실적이 좋으면 대학의 보조연구기관으로 지정해 주겠다는 내락까지 받아 전망이 좋은 편이라는 이야기다.

<학위논문 끝나면 번역 작업>
민씨의 사업포부는 이 연구기관을 발판으로 1차적으로 한국문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할 생각이다. 이중 민씨가 가장 먼저 착수하겠다는 것이 한국현대시선집 출판이다. 학위논문준비가 끝나는 대로 번역작업에 손을 대겠다고 늘 생각만 해오던 이 작업을 민씨는 이제 빨리 서둘러야겠다고 털어놓는다.
민씨가 이처럼 거창한 사업에 관한 엄두를 내게 된 것은 「페드로·로사도」(34)라는 젊은 사업가와 지우를 갖게된 덕분이다. 자본금 1천6백만「페세타」(1억5천만원)의 선박용구 제조회사경영자인 「로사도」씨는 민씨에게 태권도를 배운 것이 인연으로 동양 문학, 특히 『한국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게됐다고 한다.
동양문화원건물 부지 구입비와 건축비로 이미 2백만「페세타」(1천8백만원)를 지출하고 있는 「로사도」씨는 앞으로 5백만「페세타」(4천5백만원)가 더 들 이 문화원설립을 자기 필생의 사업으로 삼겠다고 말하며 소요자금의 절반은 이미 확보해 놓았다고 밝힌다.
「로사드」씨는 자신이 이처럼 전혀 생각지 않았던 방향으로 빠져들게 된 이유를 민씨를 통해 접한 동양적인 것의 심오함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민씨와 처음 태권도를 통해 접촉, 그와 사귀는 동안 자신의 사업·일상생활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점을 퍽 고마워하고 있다.

<열과 성 바쳐 후의 보답할 터>
그러나 「로사도」씨의 이러한 후의가 민씨에게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앞으로의 사업전망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문화원을 개관하고 난지 2년을 고비로 보고 있는 민씨는 「로사도」씨가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두려워하고 있다. 그저 열과 성을 다한 뒤의 결과를 기다릴 따름이라 했다.
당장 벌인 일에 바쁜 민씨는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어느 시기엔가 귀국해야한다는 생각에 쫓기고 있는 그의 번민은 우선 그가 한국어로 얼마큼 시를 쓸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다. 「스페인」어로 시를 쓰고는 있지만 민씨가 머리에서 이 번민을 떨쳐버린 적은 없다.
『자아』에 대해 집착해오며 『자기상실』을 뼈아프게 느껴오던 참이라 그는 자기의 『서양적인 것에 적응해 가는』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자기 기만이 아닌가 몹시 괴로워한다.
내가 나다./나는/흙담집에서 태어났다./나의 허리는 날 때부터 구부러지게 되어있고/나의 혓바닥은 날 때부터 꼬부라지게 되어 있고/나의 손은 날 때부터 바닥을 길 수 있게 되어 있고/그리고/이들은/불평 없이 동작한다.
-밤으로의 작업(『창작과 비평』 68년)-
자신이 서울서 이처럼 자조하던 자기상실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 지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마드리드=김동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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