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라진 세기의 거목-장 총통의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제2차 세계대전시대의 마지막 「거두」가 사라졌다. 「아시아」대륙의 거대한 혁명기의 한 주역이기도 했던 장개석 총통은 43년11월27일 연합국(미국·영국·중화민국)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거론, 명문화시킴으로써 전후 한국독립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이 선언은 『전기 3대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세코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갖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장 총통의 생애와 그의 사후의 문제 등을 엮어 본다. <편집자 주>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측의 「4대국 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자유중국의 장개석(중정) 총통(87)은 본토수복이란 지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타계했다.
장 총통은 49년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려 떠나왔던 본토를 그와 그가 50년간 이끌어온 국민당이 지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는 일념 속에 지난 25년간 대만과 본토 연안의 금문·마조도 만을 다스려왔다.
모택동이 날로 북경에서 공산정권을 굳히고 있는 가운데 장 총통은 그의 대만정부가 점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끝내는 3년전인 72년 자유중국의 가장 강력한 맹방인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세계해빙 분위기의 일환으로 북경을 방문한 현실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 총통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사실은 71년10월26일 중공의 「유엔」가입이었다.
그리고 중공의 「유엔」가입을 전후해서 세계 각 국은 앞다투어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그는 중공당 주석 모택동을 중국을 파멸하는 괴물로 보았으며 문화혁명, 모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임표 전 국방상 숙청 등 중국본토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로 중공정권이 수습할 수 없는 반공봉기에 부딪치게 될 것으로 믿었었다.
그는 세계지도자들이 이 같은 추세를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했으며 72년의 「닉슨」대통령 중공방문은 흔들리고있는 중공정권에 정치적 도움을 준 셈이라고 비난했다.
그의 87년 평생은 또 중국 4천년 사상 가장 파란 많았던 한 시대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영고성곤와 풍운의 일대기이기도 했다.
1887년10월31일 절강성 봉화현에서 출생한 장개석은 1907년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시절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그해 더 충분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도일하여 1910년 진무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11월 「카이로」에서 「루스벨트」(미), 「처칠」(영) 등 연합국의 거두들과 회담을 가진 장 총통은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 공동선언에 『미·영·중 3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세코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조항을 넣게 했다.
제2차 대전 말기는 일본군이 패배하고 중국이 세계 5대강국의 하나로 등장한 말하자면 중국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시기였다.
가장 암흑의 시기는 그가 49년 국공합작의 중국본토에서 철수,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을 때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50년의 한국동란 발발은 장 총통 정부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당시의 「해리·트루먼」미국대통령은 강력한 미 제7함대에 대만방어를 명령했다.
미국 군사전략가들은 장 총통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만주를 재점령하려고 한 것은 군사지도자로서의 그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지적했다.
72년7월이래 공석 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장 총통은 그때부터 병환으로 누워 있은 것으로 전해졌다.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던 그는 자양분이 많은 간소한 식사를 좋아했으며 차보다는 물을 즐겨 마셨다.
그의 주저로는 『서안반월기』, 『중국의 운명』, 『중국 속의 소련』 등이 있다. <외신종합>

<고 장 총통의 약력>
▲1887년10월31일 절강성 출생 ▲1907년 보정군관학교 졸 ▲1910년 일본육사 재학 중 귀국 ▲1911년 신해혁명 참가 ▲1923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1926년 국민당 혁명군총사령관 ▲1927년 상해「쿠데타」로 실권장악하고 남경 국민당 정부 주석이 된 후 북벌 개시 ▲1928년 북벌 완성, 국민정부 주석, 31년 사임 ▲1936년, 「서안사건」으로 장학량에 의해 감금됨 ▲1943년 국민정부 주석, 「카이로」회담 참석 ▲1948년 국민정부 초대총통 ▲1949년 총통 사임 후 대만에 은퇴생활 50년에 복임 ▲1975년4월5일 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