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총통의 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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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5일 밤 향년8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손문의 사후 실로 50년간 그는 중국현대사의 한 주역이었다.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한 전기, 항일전과 국·공 내전의 중기를 거쳐 대만으로 밀려가 본토 수복의 비원 속에서 살다간 후기 등 그의 생애는 파란곡절의 연속이었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5억의 지도자로 출발한 그의 생애가 불과 1천5백만의 지도자로서 막을 내린 것은 눈물겹다.
이러한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는 결코 성공적인 지도자였다고 만 보기는 힘들 것이다.
장 총통의 서거는 2차대전 세대의 완전한 종언을 의미한다. 연합국과 추축국을 통틀어 2차대전의 주역 중 마지막 남은 그마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제 중국도 새 질서를 모색해야할 시기에 이른 것이다.
장 총통의 서거가 한국민에게 특별한 슬픔을 주는 것은 그가 해방 전후를 통해서 변함없는 한국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년의 「카이로」회담 및 45년의 「포츠담」회담에서 우리의 독립과 광복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성원했으며 항일독립운동의 지원과 투철한 반공자세 때문에도 그는 우리국민에겐 변함없는 친근한 지도자였다. 그는 대만으로 이동하기 직전인 지난 49년8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6·25때 그는 한국전선에 최 정예부대 3만3천명의 파견을 제의하기도 했었다. 71년 중공세에 밀려 「유엔」에서 축출되는 등 외교적 비운을 겪기까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우리를 많이 도왔다. 이 모두 우리가 그를 잊을 수 없는 일들이다.
나아가 그의 성공과 실패는 몇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반공정신과 국공내전 때의 국부군 궤주의 역사가 특히 그렇다.
일본육사시절 손문과 인연을 맺은 청년 장개석은 23년 손문이 소련과 손을 잡았을 때 손문의 대표로 3개월 간 소련을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과 회견하고 공산당과 적군의 조직 및 혁명기술을 연구했다.
그는 소련의 혁명방식을 평가했지만 공산주의의 목적에 대해선 의구심을 품게 됐다.
27년 제1차 국공합작의 파탄, 서안사건 이후 성립된 제2차 국공합작의 종전 직후 파기는 모두 공산주의 전술에 대한 그의 정확한 통찰 및 의구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한때 항일전보다 공산군 토벌에 더 힘을 쏟은 때가 있다. 아마 서안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토벌작전이 계속됐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국공 내전의 가장 큰 패인은 다름 아닌 국민정부와 군의 부정부패, 그리고 공포정치였던 것이다.
「존·킹·페어뱅크」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관료의 독직이 만연했다. 정부는 도덕적 권위보다 점점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하게됐다. 부패·사기저하·탈주가 국부군을 줄곧 약화시켰다. 내전 초기에 3백만 대 1백만이던 전세가 그렇게 해서 역전됐다』고. 지금 인지에서 똑같은 일이 재연되고 있다.
장 총통 이후 대만의 제1과제는 중공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좌표를 정립하는 일일 것이다.
그의 비원이었던 본토 수복의 꿈이 현실화할 전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만의 갈 길은 현상유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중공이 당장 『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대만』방식을 용인할 전망 또한 서지 않는다.
장 총통의 서거 후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중국의 한 성으로 중국통일이 이룩되리란 풍문도 있었다.
그의 아들 장경국 행정원장은 취임 이후 본토인 우위정책을 탈피, 대만인을 대폭 지도층에 기용하는 정책을 펴왔다. 결국 『대만인의 대만』을 바라본 장기 포석이다. 역사의 방향은 결국 독립대만이거나 자치대만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거인 장개석과 모택동 이후에야 새 역사의 방향은 구상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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