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의 명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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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크메르」의 「론·놀」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바로 같은 날 「사이공」의 주 방어선인 「나트랑」이 「베트콩」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2일 전에는 「다낭」이 함락되었다. 「사이공」은 완전히 풍전의 등화처럼 시각을 다툴 만큼 명운이 급박해진 것이다.
월남이 영토의 3분의 2를 잃은 이제 남「베트남」 전토는 완전히 3분되었다. 3개의 「베트남」이 있는 셈이다. 물론 국가는 두 개 만이 들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작곡가는 같다. 월남이 「프랑스」 식민지로 있던 시절의 어느 날 병들어 누워있던 「핀·민·쉔」은 젊은이들이 「프랑스」군과 싸우러 나가는 것을 보며 젊은이여 일어나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의 월남국가다. 「쉔」은 그 후 「베트콩」에 가담하여 문화상이 되었다. 그리고 『남부를 해방시키자』는 이른바 해방전선가를 작곡했다. 이것이 지금의 「베트콩」국가로 되어있다.
이 두개의 국가 중에서 지금 「배트콩」의 노래가 더 우렁차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트랑」을 철수하는 월남군은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그만한 여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티우」대통령에게는 꿈결같기만 할 것이다. 평화협정이 「파리」에서 조인된 것은 73년 1월 27일.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월남군의 전력이 그토록 이나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태가 완전히 「스탬피드」현상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월남의 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적 난중으로 변했고, 지휘관들은 탈출에만 능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그리고 겁에 질린 군중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나보다.
이를 또 공산 측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도 같다. 공산 측에서는 점령지구 주민들을 자기네 편에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부측에 피난시켰다.
이리하여 생긴 1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은 정부의 행정능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산 측은 「크메르」에서도 이런 전술을 썼다. 그리고 일견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도인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은 2백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식량보급에 실패한 것이 「론·놀」정부를 자멸로 몰아넣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월남 수도는 미군의 출동만이 유일한 구제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군대 출동권을 크게 제한 받고 있는 「포드」 대통령으로서는 월남사태에 대한 군사개입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더욱이 협상의 마지막 기회도 이제는 잃은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한다. 「사이공」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공산 측은 「티우」정권의 내부 붕괴를 기다리는 재미(?)만이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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