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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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처참한 것이었다. 이 참혹한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도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다』고 말한 것으로 공관 복음서들은 전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온갖 체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갖가지 수모와 박해와 배신과 절망의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망적인 패배자로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 말 그대로 부활한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이긴 증거로서 나타났다.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기념은 이「예수」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다.
「부활」의 신앙은 어느 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부활은 바로 「예수」의 존재의의의 완성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죽음 이쪽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임을 증명하는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은 출발의 초석을 얻고 동력을 제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아남으로써 복음 즉 진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확실해 졌다고 사도들은 생각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났다』고.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듯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승리는 기독교 신앙인 사이에서도 언제나 해석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현실적인 사용이 가끔 자기 나름으로 편리하게 유용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비단 교리의 진보적 또는 보수적 성향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는 별개의 현실적 생활 영합에 근거를 두는 감이 있다.
그렇기는 하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개인의 성향이나 욕구가 어떻든 간에, 「부활」의 의미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진정 다시 한번 반추할만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죽음이라는 고난을 거쳐 나타난 것이며, 그 죽음이 「예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민족, 적어도 압박 받고 수난 받던 하층민 「암하레즈」의 해방을 위한 고난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불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고난받는 자를 자유롭게 하려는 속죄의 고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현실에 심으려고 스스로 짊어졌던 고통이었다.
이 「예수」의 고통은 「앞으로 올 왕국」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현실을 망각한 왕국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현세주의가 풍미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가 비 생산적이고 무기력하게 개인의 내세적 구원만을 기원하면서 안주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처럼 정의와 사랑을 위한 삶은 반드시 현세에서 승리한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야겠다.
김수환 추기경의 얘기처럼 『양심이 마비되고 정신이 썩어 가고 영혼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병들어 버린 이 사회를 밝히고 바르게 할 책임과 의무를 교회는 느껴야할』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이 같은 구조적 비인간화의 시대, 가치 전도의 시대에 「참다운 인간」을 회복시키며 사회를 개혁하고 화해와 사랑을 심는 노력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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