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코펜하겐」의 한국학 교수 신휘동씨 (1)|코펜하겐=윤호미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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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학계에는 동양 「붐」이 거세게 불고 있다. 60년대의 「히피」 문학 여파에다 중공의 「유엔」 등장으로 동양 문화에의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고 특히 중국 주변의 연구가 어느 때 보다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몽고·만주·한국이 이러한 동양 「붐」을 타고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등장, 현재 「유럽」의 대학과 박물관·도서관 등에서는 자료 수집이 한창이다.

<"신휘동 교수를 찾아 보라">
『「유럽」서 가장 많은 「동양」 자료를 갖고 있다』는 「덴마크」「코펜하겐」이 국립박물관에는 이미 지난 62년에 독립된 「한국실」을 마련, 한국 연구로서는 서구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한국 관계 자료는 이 국립박물관을 비롯, 국립도서관과 몇몇 동양 문학 연구소 등에 상당하게 많이 수집돼 있어 『한국 문화 자료는 「유럽」에서 「덴마크」가 가장 많이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렇게 「덴마크」의 학계에 한국 자료를 많이 쌓게 만든 뒤에는 지난 6·25동란 때 「스칸디나비아」 3국 병원 선에 관계하여 한국을 드나든 인사들의 도움이 컸다. 특히 서울「메디컬·센터」의 의사로 한국에 6년 동안 머물렀다가 지난 62년 「덴마크」로 돌아간 「칼박」 박사는 한국의 문화재 발굴 작업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귀국 길에 한국 정부로부터 「덴마크」 박물관에 진열할 도자기 7백여점을 기증 받아 낸 것으로 잘 알려졌다.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한국실」은 「칼박」 박사가 갖고 온 자료들을 갖고 본격적인 한국 연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연구가 요근래에 오면서 자료 수집이나 전시회, 그리고 연구 발표회에 이르기까지 직접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대부분이 한 한국인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다. 「덴마크」의학계에서 한국 관계 행사를 계획하려고 하면 으레 『신 교수를 찾아 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코펜하겐」 대학 한국학과 책임 교수 신휘동씨 (40)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문화나 민속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던 사람이 농업 경제학을 배우러 유학 왔다가 어느새 이렇게 변해버렸군요. 대구 대학 경상도 출신으로 「코펜하겐」 왕립 대학에서 농업 경제학을 전공했던 신휘동씨는 그러나 「덴마크」에 온지 15년만에 이제는 한국학 교수직 외에 「스칸디나비아-아시아 연구소」의 유일한 한국인 극동 연구원이며 왕립 도서관 동양 학부의 한국·일본 담당관으로 「코펜하겐」에서는 드문 동양통이 됐다.
그는 지난 69년에 창설된 「코펜하겐」 국립대학 한국학과에서 한국어와 한국사·한국 고전 연구·한국 문화사 등을 강의하면서 그 동안 숱한 한국 관계 전시회를 마련했으며 「덴마크」 왕립 도서관의 한 국자료는 요즘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구입되고 있다.
『외국 생활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나의 전공을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1967년1월 「코펜하겐」 대학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을 잠깐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당시 「덴마크」에 머물러 살기를 결심했던 신휘동씨는 『한국 사람으로서 쉬운 일 인 것 같아 쉽게 응했다』고 했다.

<국비 장학생으로 농업 유학>
그러나 며칠 후 12명의 학생을 놓고 평생 처음 교단에선 신씨는 『내가 왜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는가』라는 강한 회의와 함께 한국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씨는 「덴마크」 중앙 협동 조합 경제국 직원으로 그곳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엔 「덴마크」에서 협동 조합을 연구하고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신씨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협동 조합의 나라 「덴마크」에 지난 61년 저개발 기술 협조 교환「케이스」 장학생으로 뽑혀왔다. 「덴마크」의 남쪽 「하셀」의 농업 학교에서 2년 동안 농업 경제학을 공부했던 신씨는 이내 「코펜하겐」 왕립 대학교의 농업 대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협동 조합 연구를 했다.
『95년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내 전공을 실제로 익혀 보고 싶어 「덴마크」 중앙 협동 조합에 취직해 버렸읍니다.
공부를 더욱 다지기 위한 취직이 결국 신씨에게 있어선 「외국이라는 벽을 느끼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자각을 굳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한국에 대한 일만 생기면 물어 오고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 갈수록 그는 그때까지 몇명 안 되는 교포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덴마크」에서의 한국 교포는 당시 대부분 국비 장학생으로 온 농업 유학생이었고 대사관도 없었다.
신씨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포들의 연락 같은 일을 많이 맡았다. 또「덴마크」 공무원이라는 자격 때문에 한국에 대한 강연회 같은데에 자주 불러 다녔다. 특히 그는 통역 일을 많이 맡았다.
66년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 사절단이 「덴마크」에 왔을 때. 그리고 김현철 내각 수반이 친선 방문했을 때 신씨는 공식 통역관으로 일했다.

<처음 독일 「풀더」씨 교재 사용>
때문에 동양학 관계 학자들은 한국에 대해 묻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마다 신씨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코펜하겐」 대학 동양학 주임 교수 「이브로」씨가 나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대요. 그래서 처음 대학에 한국어 강의를 넣자고 했을 때 나를 추천했나봅니다.
67년 새 학기부터 「코펜하겐」 대학에서는 한국어 강의를 넣기로 결정했다. 동양, 특히 중국과 일본에 대한 문화사 연구를 하는데 있어 한국의 역할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부수적인 연구로 한국학 강의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더우기 언어학적으로 「퉁구스」와 몽고어에 새로운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현재 두 곳이 모두 공산권이기 때문에 충분한 자료를 얻지 못해 몽고와 관련을 갖고 있는 한국에 부쩍 관심이 쏠리게 됐다는 것이다.
『67년2월3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읍니다. 「덴마크」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말 강의를 내가 시작한 날이지요.
첫 강의 교실에 들어온 학생들이란 모두 중국·일본을 연구하는 현직 교수들과 박사 코스의 전문가들이 있다고 한다.
『처음 「덴마크」에 왔을 때 말을 못 익혀 그렇게 고생했는데 7년만에 최고 학부에서 한국말을 가르치게 됐으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신씨는 처음 우리말 교과서로 독일의 「풀더」 교수가 지은 『한국어 문법』 하나만 갖고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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