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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제자 선우 진>|<제44화>남북협상(33)|선우 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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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관람 공세>
주요인사 상당수의 입북을 부른「남북협상」은 다른 하편으로 이들에 대한 전향공작의 물실 호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 것. 북은 북행 요인들을 남북연석회의의 명분을 세워 주는 들러리로 이용하는 것이 만족치 않고 이들의 머리를 자기편으로 돌리는 일석삼조의 수확을 거두기 이해 안간힘을 사양치 않았다.
그 작전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각종 행사의 시각적 매머드 화와 꼬리를 무는 산업 및 건설현장에의 안내였다.
백범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만경대 혁명자유가족학원·겸이포 제련소 등 몇몇 곳 밖에 움직이지 않았지만 북이 재북 17일 동안에 마련한 관람 스케줄은 이밖에도 김일성 대학신축공사장·이른바 국립 영화촬영소·사동 탄광·선교리 부근 옥수수가 공공장 등 등 여러 군데가 더 있었다. 이에 연극·영화 관람의 여흥 스케줄까지 곁들여져 그야말로 환심 사기 총공세.
차 후미서 목탄을 때며 가는 목탄 버스에 북행인사들의 싣고 그들은 이들 코스를 차례로 돌렸다.
첫 코스는 모란봉 뒤 김일성 대학 신축공사장. 구경에 따라나섰던 강진호씨(63·서울 성북구 장위동 238의288·당시 한독당수원군당 위원장)에 듣기로는 그때 김일성 대는 2층이 막 올라갔을 때로 믹서들이 버무린 콘크리트를 한창 토해 내고 있었다.
이산 저산을 불도저로 깎은 듯 아직 허허벌판 그대로 인 채 드문드문 각단대가건물(바라크)이 들어선 착공단계였으나 캠퍼스 부지만은 광활한 편이었다. 안내자는 캠퍼스 한쪽이 전설 속의 기자능 자리여서 유서 깊은 고적이기도 하다며『우리 기술자의 손으로 동양 최대의 캠퍼스를 이룩하고 있다』는 자랑이었다.
공대가 건물엔 기관차 모형이 놓여져 있었고 문과대는 소련 공산당사 등 공산주의의 서적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이들 단 대를 한바퀴 도는데 3∼4시간이 걸렸다. 공부는 아직 평양역 건너편 2층 가 교사(전 평양 철도국인 듯)에서 해 일행은 따로 이곳을 구경했다. 학생들의 모자는 베레모에 챙을 단 이상한 모양이어서 인상에 남는 것이었다.
서 평양 교외의 이른바 국립영화 촬영소 역시 2층 건물이 하나 섰을 뿐 건축단계. 소련서 들여왔다는 조명기구·촬영기들이 가건물에 임시로 설치돼 있었다. 소장은 월북한 영화인 주 모씨(이름 불상·당시 40대)로 건설상황도 자랑할 겸 월북인사들이 잘 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데를 골라 안내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동강변 선 교리의 옥수수가 공공 장과 여기서 서호리 방면으로 가다 있는 사동 탄광은 겸이포 제련소와 찬가지로 일제가 세운 시설이긴 하나 규모로나 틀이 잡혀가는 운영상으로 보나 이런 공장들이 없는 남쪽 인사들의 눈을 현혹케 하기엔 족한 시설들.
사동 탄광의 경우 산더미 같은 채굴무연탄이 컨베이어를 따라 공장으로 날라져 자동적으로 마세크 탄이 찍혀져 나오고 있었으며 30t씩 끊어 레일 위에 대기 중이 화차에 역시 자동적으로 실어지는 일관작업은 볼만했다.
일제 때 축구팀이 유명했던 옥수수 가공공장은 옥수수를 원로로 포도당을 비롯한 20여 가지의 완제품이 나온다는 설명. 두 공장 모두『우리 기술로 돌린다』는 예의 자가 발전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관람 막간을 이용해 보여준 영화는 소련작품의 천연색『석화』였고 연극은『이순신 장군』이었다.
영화를 본 극장은 전 황금정의 목조 2층 금천 대좌,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정종(청주)금천대 메이커가 술 이름을 따서 지은 극장으로 서울 후암동 병무청 자리에 이 양조장의 본사가 있었다.
『석화』는 그때 7색도 칼라여서 보통의 5색도 보다 앞섰다는 자랑이었으며 6·25 적 치하 때 서울에서도 여러 번 상연된 공산혁명 선 전무이었다.
연극 『이순신 장군』은 이 금천 대좌 건너편 어느 극장서 보았으며 주연은 월북한 성격 배우 황 철이 맡았다.
기타 등장한 배우들은 여우 박영신(당시 37∼38세), 배용(40)부부와 엄미화(20세 남짓), 이동호(35∼36세), 심영(36∼37세)등 등. 대부분 월북한 조선예술극장 멤버들로 서울에 있을 대『맹 진사 댁 경사』(시집가는 날)에 조연으로 나오기도 해 일부 북행인사들에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맹 진사 댁 경사』에선 엄미화가 종 역을, 박영신이 노파 역을 맡은 것으로 기억된다.
일행 중 강진호씨는 해방 직후 조선예술극장 흥행에 관여한 적이 있어 이날 분장실을 찾아 박영신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연극 내용은 아직 공산혁명사상으로 각색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무대만은 이름난 정치가들이 상당수 월북한 탓인지 꽤 호화로웠다. 이들 각종 관람공세의 결과는 북행인사 중 일부가 잔류한 사실과 관련, 사상적으로 완전히 무장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다소 현혹 적이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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