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인계철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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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말 처음 등장했다. 독일군이 영국군의 진지에 폭약을 매설해 터뜨림으로써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17년에는 독일군이 영국군의 신무기인 전차에 대항해 대전차 지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사용하는 지뢰인 기뢰(機雷)를 최초로 실용화한 사람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부친으로 알려졌다. 배와 접촉하면 폭발하는 방식의 이 수뢰는 크림 전쟁(1854~56) 때 첫선을 보였다.

17세기 영국 근위보병 연대의 전투 기록에는 초기 형태의 수류탄이 등장한다. 현대적인 방식의 수류탄으로는 1915년 영국인 윌리엄 밀스가 발명한 '밀스 수류탄'이 대표 주자로 꼽힌다.

안전핀을 당기면 시한 장치가 된 신관이 작동함으로써 폭발, 쇳조각이 사방에 날아가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원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참호전에서 수류탄은 요긴한 무기로 각광받았다.

지뢰.수류탄 같은 폭탄과 연결해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도록 만든 장치가 '인계철선(引繫鐵線.trip wire)'이다. 인계철선을 이용한 전형적인 위장 폭탄은 부비트랩이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또는 길에 놓인 귀여운 인형을 호기심에 집어들었다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게 하는 부비트랩은 인간 심리의 허(虛)를 찌른다는 점에서 사람의 잔인.교활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웅변한다. '하얀전쟁'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풀메탈 자켓'같은 전쟁영화를 상기해 보라.

한반도에서 인계철선은 북한이 공격할 경우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주한미군의 역할을 뜻하기도 한다.

지난 6일 고건(高建)국무총리는 주한 미국대사에게 인계철선 유지를 비롯한 '주한 미군기지 재배치 3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흘 전 미 국방부 고위 관계자가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에게 "인계철선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못박음으로써 한국 입장이 머쓱하게 됐다.

최소한 아무런 사전 조율도 거치지 않은 원칙이었다는 방증이다. 우리 안보정책의 예측 가능성은 한번 더 상처를 입었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정치.경제.군사 부문에 걸쳐 갖가지 형태의 인계철선이 쳐져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이를 한낱 거미줄 정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노재현 국제부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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