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성별 진단 요구는 성희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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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여자 축구선수 박은선(27·서울시청·사진)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여자프로축구 WK리그 6개 구단의 지도자들이 철퇴를 맞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들의 행동을 성희롱이자 인권침해로 결론 내렸다.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인권위는 24일 전원위원회를 열고 박은선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은 WK리그 지도자들의 행위에 대해 성희롱이라고 결론 내렸다. 인권위는 “‘의학적인 방법으로 성별을 명확히 가려야 한다’는 지도자들의 발언은 해당 선수(박은선)에 대해 성별 진단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성적 굴욕감과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이므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대한축구협회장에게 해당 지도자들에 대한 징계를 권고했다. 아울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대한체육회장, 대한축구협회장, 여자축구연맹 회장 등에게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도 권고했다.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6개 팀 지도자들은 지난해 10월 박은선의 성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며 “리그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관련해 박은선의 소속팀 서울시청이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 본선을 포함해 국가대표로 A매치 20경기를 치른 박은선에 대해 성별 진단을 요구한 것은 인권침해이자 언어적 성희롱”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인권위의 결정 이후에도 박은선의 정신적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여자축구연맹이 박은선과 WK리그 지도자들 간 중재에 나섰지만 선수가 거부했다.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은 “은선이는 이제껏 해당 지도자들로부터 전화로든 문자로든 단 한 번도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며 “아직까지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경기력도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22경기에서 19골을 넣어 WK리그 득점왕에 올랐던 박은선은 올해 겨울 전지훈련에서 13경기 2골로 부진했다. 서 감독은 “성별 논란이 불거진 이후 은선이가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25일 키프로스로 출국한 여자축구 대표팀 엔트리에 박은선이 빠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윤덕여 여자대표팀 감독은 “서울시청의 연습경기를 지켜봤지만 박은선의 몸이 무거웠다”며 “대표팀에 뽑지 않은 건 인권위 결정과 무관하다. 언제든 기량을 회복하면 대표팀에 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선은 조심스럽게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이다. 과거엔 일본·독일·미국 등 러브콜을 보내는 해외 클럽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생각을 바꿨다. 서 감독은 “요즘 은선이가 ‘외국에서 뛰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며 “자신을 쫓아내려 했던 사람들과 그라운드 안팎에서 마주쳐야 하는 현실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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