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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지식인은 이렇게 「스탈린」손에 넘어 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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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루스벨트」 「처칠」, 그리고 「스탈린」의 3거두는 「유럽」의 분할과 한반도의 분단점령 등만 「얄타」회담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2백여만명의 반소적 망명가·포로·피난민들을 「스탈린」에게 넘겨주는데 「처칠」과 「루스벨트」는 동의했고, 또 이를 실천하는데 영군이 기만책까지 썼다는 「얄타」의 비밀이 최근 공개되어 「유럽」인들을 전율시키고 있다. 「아유슈비츠」 「닷하우」 등 「나치」수용소의 악명에 눌려 30년만에야 「베일을 벗은 이 「러시아」인들의 비극은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최후의 비밀」로 장식될 것 같다.
최근 「파리」에서 출간된 『마지막 비밀』에서 이 「얄타」의 비밀을 폭로한 저자 「니콜라스·베첼」은 1972년부터 「얄타」에 관한 문서열람을 허용한 영국정부의 덕택으로 뒤늦게나마 이 사실들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종전 무렵 「유럽」의 「나치」점령지역에는 약2백만명의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1945년2월13일 「크리미아」반도의 「니콜라이」2세궁 「유스포프·살룽」에서 이른바 「얄타」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나치」휘하에 들어가 있는 모든 「러시아」인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먼저 「처칠」이 동의했고 이어 「루스벨트」가 OK했다.

<대부분 귀국 불원>
그러나 이들 「러시아」인들은 귀국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3거두 가운데 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스탈린」뿐이었을까, 아니면 「처칠」과 「루스벨트」 등 알면서 서명했을까? 이들 「러시아」인들을 소련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투옥·고문·유형, 그리고 「나치」와 별 다름없는 강제수용소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군장교들은 「얄타」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지 못했다. 「런던」과 「워싱턴」의 최고위장성들만이 이 비밀을 알고 상당히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든」 「처칠」 「스팀슨」경 등은 이들 「러시아」인들이 「스탈린」의 손에 인계될 경우 죽음으로 이끌려 가리라는 것을 거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든」경은 소련정부가 그들의 재외교포에 대해 취하는 조치에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니다』고 외교적 잔혹성을 드러냈다고 이 『마지막 비밀』은 서술하면서 『수주일 후 노동당정권이 들어서서도 잔혹한 외교는 변함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이든」자리를 이어받은 「어니스트·베빈」도 불행한 「코자크」족들의 문제에 대해 『내버려 두라』는 수수께끼 같은 한마디를 했는데 『소련으로 가도록 그냥 두라는 말임에 틀림없다』고 비난하고 있다.

<드라우강의 비극>
「유럽」이 주둔 미 영 사령부는 「얄타」의 합의를 실행키 위한 사상 유례없는 비인도적 작전을 수행했다. 사령부는 너무나 엄청난 숫자의 「러시아」인들을 공정한 판단으로 구별해서 처리할 능력이 부족했다. 물론 전쟁포로 속에는 다국적의 인간들이 혼합되어 있었고 이중에는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코자크」(카자흐) 등의 「러시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영군의 잔혹한 작전은 「오스트리아」의 경계를 짓는 「다뉴브」강의 지류 「드라우」강에서 이루어졌다. 1945년5월 「드라우」강의 「유고」쪽 기슭에는 소련의 적군이「트럭」을 대기시키고 「오스트리아」측 기슭에서 미·영군이 보내줄 「러시아」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소련에서보다는 차라리 「나치」지역에서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군이 차마 자기네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지는 안겠지하고 미·영군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며 그래서 강변에 임시로 만든 수용소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영군은 작전명령을 받았다. 또 『「러시아」인들에게는 적군에게 인도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도 동시에 받았다. 영군은 회의를 연다는 속임수를 써서 수용소밖에 「러시아」인들을 모았다. 물론 이것은 노인과 부녀자 및 어린이들을 남자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목사·신부 등 항거>
이를 알아차린 「러시아」인들은 목사·신부들을 앞세워 대종교집회를 열고 영군과 맞섰다. 영군들은 마구 개머리판을 휘두르고 공포를 쏘아댔다. 「러시아」인들은 허리끈으로 목을 매거나 칼로 동맥을 끊어 자살하는 자가 속출했다. 결국 영군들은 「러시아」인들을 강제로 「유고」땅에 인계했다.
이 「잔혹한 작전」은 4개월 후인 1945년8월에야 「아이젠하워」장군에 의해 끝을 맺었다. 미·영과 소련이 연합군으로서 맺은 우호와 친선은 이 「비인도적 작전」이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베첼」은 지적하고 있다. 1946년 「처칠」의 유명한 연설 「철의 장막」을 상기시키면서 『「드라우」강의 불행했던 「코자크」 등 「러시아」인들은 그후 냉전의 「파이어니어」가 아니었는지 모른다』고 결론을 맺었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얄타」협상이란>
1945년2월11일에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처칠」 영국수상과 「스탈린」 소련수상이 전쟁 수행 및 전후 처리문제에 관해 체결한 비밀조약.
45년2월4일부터 11일까지 이들 3거두는 소련 흑해연변의 「얄타」에서 독일의 항복이후 곧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다는 조건으로 「스탈린」이 요구한 광범한 이권 등을 「루즈벨트」 「처칠」 등이 들어줌으로써 후일의 불씨를 남겼다
특히 미·영이 태평양전쟁을 빨리 종결시키려고 너무 서두른 나머지 「스탈린」의 음흉한 훈계에 말려서 한국의 분단사태 등 종전 이후 커다란 국제분쟁을 일으키게 만든 중대한 회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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