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장의 세태변모 반세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에 최상씨 등이 지어 문을 연 유서 깊은 요릿집으로 당시 단성사 맞은 쪽의 명월관, 남대문로1가의 식도원, 송죽원(인사동 종로구청 자리) 등과 함께 4대 요정으로 꼽혔다.
명월관은 고관대작과 토박이 부자가, 식도원은 일본인의 출입이 잦은데 비해 국일관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이용한 요릿집이었다.
국일관에는 다른 요릿집과 같이 장안의 명기들이 손님을 접대,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한량들의 놀이터로 나라를 빼앗기고 출세길이 막힌 양반집 자손들의 시름을 달래주는 기방으로, 우국지사들의 밀회 및 울분토론장소로, 신식인사들의 사교장으로 세태와 함께 변해왔다.
당시 국일관에는 뒤뜰에 정자까지 있었고 나박김치가 유명했다.
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기생들은 간호원·정신대로 끌려가 한때 폐쇄됐다가 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군전용「카바레」로 이용됐다. 그후 김여백씨가 맡아 2층을 올리면서부터 명실공히 국내최대요정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당시 여운형씨 등 국내 거물급인사들이 자주 출입, 건국준비 또는 정치회담장소로 쓰여지기도 했다. 한때는 남노당 「푸락치」들이 국일관기생을 매수, 지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6·25후에는 불탄 자리에 다시 옛모습대로 지어 영업을 계속했으나 밀어닥친 양풍으로 사양의 길을 걸어왔다. 이로부터 국일관은 김씨의 손을 떠나 59년엔 정용섭씨에게, 61년엔 조흥은행에, 65년엔 경제인연합회로 옮겨졌다가 지난해에 현 소유주인 삼영개발소유가 됐다. <신종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