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세월에도 보람은 있었다"|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수감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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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석방된 구속인사들은 1년간의 「수감자생활」이 한결같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구치소·교도소 등에서 옥고를 함께 한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료들은 「우리말 쓰기 운동」·토론회·역사강의 등으로 보람된 시간을 가져보려고 애썼지만 생소한 교도소생활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석방된 구속인사들의 입을 통해 수감 1년의 이모저모를 들어본다.
김동길씨(연세대교수)는 처음 5개월간 서울구치소에서 독방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9월말 안양교도소로 옮기면서 민청학련관계 학생 8명과 같은 방을 쓰게됐다.
김씨는 월·수·금요일은 영시를, 화·목·토요일에는 국사 및 서양사를 매일 3시간씩 강의도하고 토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스레 소강의실을 「빵깐」으로 옮긴 듯한 느낌-. 학생들은 「민립대학」이란 이름를 붙여놓고 강의시간 때마다 대학교의 강의실 못지않는 진지한 태도로 열중했다는 것.
김 교수의 강의내용은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미국의 남북전쟁 등 주로 서양사의 「하일라이트」에 중점을 두었고 때로는 「앨프리드·테니슨」 등 시인들의 작품을 해설하기도 했다.
시인 김지하씨(34)도 처음 3개월 동안은 잡범들과 함께 있었으나 그 뒤 7개월은 줄곧 독방생활을 했다.
김씨가 복역한 영등포구치소의 독방은 0.8평으로 다리를 마음대로 펼 수도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잡범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이야기도 나누며 소일했지만 독방으로 옮긴 뒤로는 글을 쓸 수 없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첫 번째 구속됐던 백기완씨(백범사상 연구소장)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이규상 전도사·고영식군(연세대2년)과 같은 방을 썼다.
백씨는 긴급조치위반자들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을 보면 교도관들이 어찌나 빨리 알고 달려오는지 교도관을, 「택시」라 불렀다고 했다. 교도관들은 하루 7번 이상 주의를 시켰고 3초 이상 말도 못하게 했으며 심할 때는 서로 옷깃이 스치지도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 구속자들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택시」 온다!』고 하면 벙어리가 되어버리곤 했다는 것.
백씨는 교도소 측에서 교화·교정을 위해 요구하는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켜 교도관들 사이에 모범수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백씨는 사소한 규칙을 어기고 어떻게 「대의」를 위해 싸우겠느냐는 생각에서 즐겨 피우던 담배까지 끊었다고 말했다. 백씨는 교도소 안에서도 「우리말 쓰기」운동을 벌여 영어나 일본어를 일체 쓰지 않고 이 운동은 교도관들에게까지 번지게 했다.
백씨는 또 교도소 안에서 장기·바둑은 두게 하면서 고유민속인 윷놀이는 못하게 한다고 지적, 윷놀이를 할 수 있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안양교도소에 있었던 황길웅씨(통사당정치위원)는 수감중 매일 냉수마찰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손과 발 두 곳에 동상이 걸렸다. 황씨는 지난해 11월 함께 있던 김양수씨가 아침 점호시간에 웃도리 단추 한 개가 풀렸다고 매를 맞자 이에 항의, 끝내는 관계자들로부터 사과를 받기도 했다.
황씨는 또 안양교도소에 수감중인 전특권층 Y씨는 다른 사람이 사역을 하는데도 「테니스」를 치는 등 우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방에서는 자주 불고기냄새도 새어나와 모두들 『코가 곱징역산다』며 씁쓸해 했다는 것.
이광일군(27·한신대2년)은 『세상에서 제일 음식 맛이 좋은 곳은 교도소』라고 말했다.
교도소에서 주는 「4등식」은 양이 너무도 적어 언제나 먹은 둥 만 둥 해 항상 배가 고픈 상태이기 때문.
이 때문에 영치금이 넉넉한 사람은 구내식당에서 자장면 등을 따로 한 그릇씩 사먹어 배를 채운다는 것.
나병식군(26·서울대 문리대4년)은 교도소에서 주는 반찬이 시원치 않아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조그만 「비닐」봉지에 2백50원씩 비밀히 파는 김치를 사먹었다. 나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김치찌개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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