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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예언의 원리와 숙명론의 음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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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지난해 한국에선 영화 ‘관상’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덕분에 점집에 사람들이 몰리고 성형외과가 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어느 사회나 점술의 문화가 있게 마련이지만, ‘얼굴에 삼라만상이 담겨 있다’는 주제의 영화에 거의 천만의 관객이 몰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숙명론이 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소도시에서 족집게로 소문난 한 노인은 내게 점의 원리를 일러주었다. 뜻밖에도 그는 관상, 사주팔자, 자미두수 등 전통적 산명(算命)의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운명을 내다볼 순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언을 해왔느냐고 묻자 그는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걸 일러줬을 뿐인데, 스스로 알아서 내 말을 따라 움직이더라.” 점술이란 마음에 암시를 거는 기술이란 얘기였다. 그 암시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 그 예언을 실현하고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술인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타인의 마음에 주술을 건다. 오늘날 널리 퍼진 사주풀이는 10세기께 중국 서자평의 점서 연해자평에서 연원했다. 만세력에 따라 천간지지의 여덟 글자를 뽑고 음양오행의 역관계에 따라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이다. 어찌 보면 천 년 전의 민간신앙이 담긴 산술적 도식일 뿐이지만 비견, 겁재, 식신, 상관 등 이른바 십신육친의 신비한 점술의 언어가 마력을 발휘한다. 역술인은 바로 그 언어를 익혀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점술이란 결국 강력한 마음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예언을 실현시키는 기술인 셈이다.

 불교의 법구경은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는 경구로 시작한다. 유가의 대학(大學)은 마음의 지각능력과 자발성을 수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성경의 마태복음은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신념의 원리를 설파한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형태의 결정론에 맞서 운명을 바꾸는 마음의 힘에 주목했다. 최신의 정신과학은 환경결정론 및 유전자 지배이론을 넘어 체계적으로 마음의 원리와 정신적 잠재력을 탐구한다. 그런 진취적 자기계발의 철학은 이미 수천 년간 결정론에 맞서 인류의 정신사를 이끌어온 도도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숙명론의 유혹에 빠진다. 팍팍한 현실에서 꿈과 희망이 꺾이고 좌절되면 한계를 인정하고 체념과 순종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부와 권력을 선점한 소수의 입장에서 보면, 숙명론만큼 편리한 이데올로기도 없다. 예언의 형식을 취하지만 모든 숙명론은 이미 일어난 사태를 사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합리화한다. 그 때문에 신분적 위계질서와 직능의 한계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어김없이 숙명론이 득세한다. 숙명론이란 지배계층의 음모인지도 모른다.

 막스 베버의 통찰대로 근대화는 “탈(脫)주술의 과정”이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선 창조적인 기업가정신이 합리적 문화와 전문적 지식계발을 이끌었다. 성장하는 경제, 변화하는 사회에선 숙명론이 쉽게 퍼질 수 없다. 집값이 뛰고 주가가 치솟고 취업의 기회가 열릴 때 숙명론은 물러난다. 한국사회에서 바로 지금 숙명론이 고개를 드는 것은 장기적 경제침체의 징표가 아닐까. 치부와 출세의 꿈이 좌절된 다수가 체념과 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은 아닐까.

 불과 얼마 전 상위 1%를 향한 99%의 격한 시위가 세계 곳곳을 강타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상위 1%가 슬그머니 숙명론의 속임수를 퍼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숙명론이 유포될 때 이익을 보는 집단은 맨 꼭대기에 올라간 지배층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숙명론에 빠져 체념과 순종을 학습할 때 영악한 소수가 맨 위까지 올라가선 유유히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실존적 선택의 문제다. 생김새와 생년월일로 미리 결정된 운명을 알 수 있다는 음험한 숙명론의 주술에 걸릴 것인가. 마음을 닦고 계발하면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 가르침을 수용할 것인가. 숙명론이 고개를 드는 조국을 향해 중국의 지혜로운 노인이 내게 전한 마음의 원리를 전하고 싶다. 점의 이치를 터득하면 숙명론의 음모를 물리칠 수 있다고.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