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스웨덴」의 전화기「디자이너」박근홍씨(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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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톡홀름=윤호미 특파원】특히 북구에서는 동양과의 거리 차 때문인지 박씨가 왔던 1950년대까지 동양인은 길거리의 주목거리가 될 정도였다.
『평생 처음 동양사람을 직접 만나 본다』고 말하면서 가까이 오는「스웨덴」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박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닥친 것은 물론, 그 어렵기로 소문난 「스웨덴」말을 익히는 일이었죠.』박씨는「알름크비스트」할머니의 친구 집에 방을 얻어 있으며 주인아주머니에게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식이름·식료품이름을 서로 한국어와「스웨덴」어로 바꾸어 가르치면서 지냈다. 식료품상을 경영하는 이 집에서 박씨는 이내 점방에 나가 일을 거들어줄 정도가 됐다.

<"동양사람 처음 만나본다">
『할머니가 공부하는 것과 약혼자를 데려오는 데까지 모든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제 입장으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내가 절약해야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모든 생활을 희생해가면서 일하는「알름크비스트」여사를 볼 때마다 박씨는 자립하는 것만이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스웨덴」에 온지 3개월만에 박씨는 우선 공부보다 직장을 구하는데 손을 쓰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에「L·M·에릭손」회사가 있었어요. 우연히 거기에 찾아가서 일자리를 물어봤더니 기계부속품 만드는 보습공일을 맡기더군요.』의학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로 찾아낸 일자리가 결국 박씨의「꿈」을 바꾸어 놓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실습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업학교에 갈 생각을 굳혔다는 것이다.
원래 박씨는 58년 봄「스웨덴」장학위원회에 장학금을 신청했으나 바로 그 해부터 외국인에게 지급이 줄어들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때 돈 많이 드는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라고 판단했습니다.「에릭손」회사 실습 일이 재미도 있고 돈도 비교적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공업학교에 가서 더 공부하여「엔지니어」가 될 계획을 했지요.』또한 외국인으로서는 이과가 비교적 직장을 얻기가 쉽다는 여러 사람들의 충고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아침 7시부터 저녁 4시30분까지의 실습공일을 하면서 밤에는「스웨덴」어 강습소에 다녔다.
『일만 많이 해내면 주급을 더 주기 때문에 강습 비 내고도 혼자 생활할 수 있었어요.』
1957년 11월 박씨가 온지 6개월만에 약혼자 박부년씨가「스웨덴」으로 왔다. 이때 여비는 물론「할머니」가 내겠다고 했지만 박씨는 자신이 그 절반을 대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 약혼자는 이국 땅에서 재회하고 1년 동안이나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약혼자가 오면 이내 결혼을 하려고 계획했지만 우리가 살 방을 구할 수 없어 결혼식을 못했습니다.』현재「스웨덴」은 어느「유럽」국가보다 주택난이 없는 곳이지만 20년 전 당시에는 집을 구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이들은 처음으로「이방인」의 쓴맛을 겹쳐 맛보았다.

<할머닌 주택관 실서「데모」>
『신문광고를 보고 집을 찾아가면 문을 열어보고「미안하지만 예약됐다」고 한결같이 대답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지요』동양인에게 셋방을 준다는 것이 당시로는「스웨덴」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모험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박부년씨는「알름크비스트」할머니의 병원숙소에 같이 살면서 개인약국에 취직하여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박씨는 결국 셋방 얻는 일을 포기하고 새로 짓는「아파트」를 알아보기로 했다. 「스웨덴」인들도 이런 새「아파트」를 얻기 위해선 보통1, 2년씩 기다려야할 판인데 그는 이 경쟁에 뛰어 들었다.
『「스톡홀름」부근「소르나」시장을 찾아가서 직접「아파트」를 마련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스웨덴」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워낙 급해서 뛰어들어 봤습니다.』
시장은 박씨의 사정을 듣고『어렵지만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씨가 그 후 10여 번 찾아가도록 해답을 얻지 못했다. 시장은 주택 관에게 전화해서『주선해 주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할머니는 최후수단으로 주택 관에게 매달리자고 했지요.』「알름크비스트」여사는「소르나」시 주택 관의 사무실 앞에서「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비번 날이면 뜨개질거리를 갖고 가 주택 관실 앞 복도에 의자를 놓고 앉아 주택담당관이 문을 열면 이내 보이도록 했다. 『주택 관이 할머니만 보면 골치가 아프다고 했을 정도였지요.』「알름크비스트」여사가 이때 주택 관실 앞에서 뜨개질한「스웨터」와 목도리들은 모두 한국고아원에 보내졌다. 이들은 마침내 반년만에 새「아파트」입주권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자립맹세」를 결혼선물로>
『새로 짓는「아파트」에 매일같이 두 사람이 찾아가서 오늘은 이만큼 공사했구나 하고 살폈지요.』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소원했던 새「아파트」가 채 공사를 끝마치기 전에 역시 「소르나」시에 침실 2개 짜리의 집을 얻을 수 있게되어 할 수 없이 새「아파트」를 취소하고 말았다.「소르나」시장은 이 일 때문에 뒷날까지 동양사람만 보면 얼굴이 같으니까『당신「미스터·박」이지요? 집이 마음에 듭니까?』하고 말을 걸어 여러 번 실수를 했다고 한다.
1958년 12월1일 박씨는 지방으로 전근 가는 할머니 친구 간호원의 집을 빌어 이사를 하고 같은 달 27일 약혼자가 오고 1년1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렸다.『교회등록을 가니「스톡홀름」에서는 한국인들끼리의 결혼이 처음이라 양식을 모르겠다고 난색을 보였어요. 교회에선 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식을 해주는데 우리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박씨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한 교회서기에게 부탁하여 새로운 양식의 서류를 꾸며 결혼식을 허락 받았다.
「알름크비스트」여사가 양가의 부모를 대신한 이들의 결혼식에는 당시「스웨덴」병원 선에 근무하다 온 사람들과 국제 결혼한 한국여성 등이 참석하여 한국민요를 축가로 불렀다. 『노력해서 자립하겠다는 맹세를 서로의 결혼선물로 교환했습니다.』

<알림>
전회로 끝난「파라과이」양계왕 전영환씨의 주소는 Mr.Chun Yung Whan. Granja Chun. Aregua, Paragua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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