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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작은 비석,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가 숨어 있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 청계천 광통교에 놓여있는 정릉 석물. 2 미대사관 저 하비브하우스 경내에서 발견된 석물. 이 역시 신덕왕후의 릉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만국평화회의보 1면을 장식한 헤이그특사 3인의 기사. 4 배재역 사박물관 앞 향나무 허리춤에 박힌 못.

서울 정동의 탐방 길에선 구한말 격동의 역사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흥미로운 역사의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승재(단대부중 1)·양현서(서울 개일초 6)·이유진(과천 청계초 5)·문소희(안양 연현초 4) 학생기자와 함께 정동의 숨은 그림을 찾아 나섰다.

정동엔 정릉이 없다?

장수가 말을 타고 가다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한 처자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한다. 처자는 물그릇에 나뭇잎을 띄워 건넨다. 장수는 묻는다. 왜 나뭇잎을 띄웠는가? 여인은 답한다. “급하게 마시다 체하실까 두려워서입니다.”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다. 태조는 첫 아내 신의왕후 한씨보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덕왕후는 명이 길지 않아 태조 5년(1396)에 숨졌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貞陵)을 궁궐과 가까운 도성 안에 만들었다. 태조는 정릉 옆에 절을 지어놓고 아침마다 제 올리는 종소리가 울려야 비로소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정동(貞洞)이라는 이름은 바로 정릉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 정동에는 정릉이 없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가 아닌 신의왕후의 아들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 얼마지 않아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정릉이 다른 무덤과 달리 홀로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정릉을 장식하던 석물은 청계천 광통교로 옮겨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원래 정릉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캐나다대사관이 있다. ‘정동’이라는 이름만이 여기 정릉이 있었다고 말해주는 셈이다.

“여기에선 말에서 내려 걸어가시오!”

정동길과 맞닿은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 1층 카페 ‘버즈 앤 벅스’에 가려면 팔작지붕 대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팔작지붕은 시옷(ㅅ)자로 맞붙은 지붕 옆면에 짧은 지붕을 덧대 멋을 낸 조선시대 최고급 건축 양식이다. 대문 앞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가 적힌 비석이 하나 있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할 만큼 신분이 높은 이가 살았음을 알리는 이러한 푯돌을 하마비(下馬碑)라 한다. 정릉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간 뒤에도 풍수지리가 좋은 이 땅에 높은 양반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종묘·성균관 등에도 하마비가 있다.

누가 500년된 향나무에 못을 박았나

배재역사박물관 앞에는 수령이 500년쯤 된 16m짜리 향나무가 한 그루 있다. 향나무 허리춤에는 커다란 못이 하나 박혀 있다. 누가 저 높은 곳에 못을 박았을까?

임진왜란 때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종묘에 주둔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밤이 되면 신병(神兵·귀신 병사)이 나타나고, 귀신에 홀린 왜군은 서로를 칼로 찌르는 등 자꾸만 죽어나갔다. 이에 왜군은 종묘는 불태우고 주둔지를 남별궁(南別宮)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 5월 3일자 일기에 남아있다. 남별궁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데 쓰인 궁으로 지금의 소공동의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남별궁 터와 배재역사박물관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왜군 장수가 말을 묶어두려고 향나무에 못을 친 게 빠지지 않은 채 자라고 자라 지금의 높이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정릉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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