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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중국 읽기]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문이 무너지면 집이 위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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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전문기자

  ♣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무딘 붓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책을 보고 며칠 지나면 알갱이는 흩어지고 잔상(殘像)만 남는다. 그래서 몇 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제5화> 『북한·중국관계 60년』 (2013년 3월, 히라이와 슌지 저, 선인)

♨ 북한과 중국 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입술은 북한, 이는 중국을 말한다. 중국은 1950년 11월 초 6.25 전쟁 참전을 결정한 직후 참전의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고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문이 무너지면 집이 위험하다’고.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는 북한이 중국에 부담인지, 아니면 자산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양국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골격은 아직도 순망치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이 공히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대 세력의 첫째로 미국을 꼽고 있는 한 북한과 중국은 순치의 관계다. 서로 불만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내칠 수는 없다. 일본인 학자가 쓴 이 책은 북·중 두 나라의 관계를 ‘순치(脣齒)’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그 구조가 어느 경우에 변용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을 시도했다. 주요 대목을 정리해 본다.

☞ “김일성이 중국에 총 39회 방문하였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공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20쪽)

☞ “북한과 중국 관계엔…특수성이 존재한다. 그 요인으로서 다음의 4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먼저, 북한과 중국이 함께 조국통일과 ‘대만해방’이라는 혁명과제를 남겨놓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나라에게 최대의 ‘혁명의 적’이 미국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둘째로, 양국이 서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이며 특히 동서냉전체제 아래서 이데올로기상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셋째로, 북중 사이에서 자주 강조된 전통적인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순치의 관계’ ‘전통 우의’와 같은 말로 표현되는 북중의 전통적 관계다…넷째로, 경제관계도 양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20~22쪽) (촌평: 북중을 연결하는 4개 요인이 정리돼 있다. 안전보장상에서의 공통의 적 미국, 사회주의 이념, 전통적 우의, 경제 실리다. 저자는 안전과 경제 문제가 양국의 축이 되고 전통적 우의와 이데올로기는 치장이 될 것이라 분석한다)

☞ “1950년 10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그 전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제18차 상무위원회에서 보고를 행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중국에게 있어서 조선문제가 단지 한반도에 한정된 특정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완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된 문제라고 말한다…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한국전쟁은 미국의 ‘위협’에 대해 스스로 안전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라는 ‘보가위국(保家衛國)’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32~36쪽) (촌평: 중국이 왜 한국전쟁을 자신의 집과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전쟁이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 “중국의 그러한 인식은 중국참전 후 1950년 11월 4일 중국공산당을 시작으로 민주 여러 당파에 의한 합동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역사의 사실은 조선의 존망이 중국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찍 가르쳐 주고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문이 무너지면 집이 위험하다. 중국인민이 조선인민의 항미전쟁을 지지한 것은 단지 도의상의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 인민의 절실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자위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중국의 참전은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는 것만이 중심적 요인이고, 중조 우의는 2차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36~37쪽) (촌평: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이유가 순망치한의 관계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있다)

☞ “1957년 6월 23일 인민일보는 ‘조선정전협정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고, ‘미국침략집단의 계획 가운데는 조선남부, 중국의 타이완, 베트남 남부가 시종 미국이 중국을 침략하는 3개의 전선이고, 3개의 중요한 침략기지이다’라는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를 강조하였다” (56쪽)

☞ “닉슨 방중이 발표되기 전일 1971년 7월 15일 이른 아침, 저우언라이는 스스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두 번에 걸쳐 회담을 갖고, 그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회담에서는 닉슨 방중과 키신저의 비밀방문에 대해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에 대해 직접 보고하였다는 것이다…북한 측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충분한 행위였다” (208~209쪽) (촌평: 저우언라이 외교가 보여주는 용의주도함을 읽을 수 있다)

☞ “미중 접근은 ‘지역문제의 지역화’-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변 지역의 문제에 스스로의 관여를 피함으로써, 그것이 미중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않는 구조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217쪽)

☞ “중국은 타이완문제와 한반도문제의 연계를 형해화시켜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를 강조함으로써, 미중관계의 진전과 중조 관계의 유지라는 본래 저촉할지도 모르는 두 개의 사건을 양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해도 좋다… 중국이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를 목표로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제한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중국은 ‘미 제국주의가 한반도 내부문제에 대해 간섭할 구실은 없어졌다’라고 주장하였지만, 똑같이 중국자신도 ‘한반도 내부문제에 대해 간섭할 구실’을 잃었다” (225~226쪽)

☞ “닉슨 방중으로 상징되는 미중 접근은 1979년 미중 국교정상화에 의해 일단 구분 짖게 된다…아시아에 있어서 동서 진영 간의 대립은 경제분야에 한정된 경쟁으로 수렴되었다. 그러한 환경을 전제로 중국, 북한은 스스로의 체제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방법은 달랐다. 중국에서는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말하자면 ‘4개 현대화 노선’이 채택되었고, 이것이 개혁개방노선의 기점이 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자세가 외교면에서 현재화하는 것은 1982년부터였다.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12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은 그때까지 미국 혹은 소련을 주요 적으로 설정하고, 그 이외의 국가와 연합을 취하는 노선으로부터 주요 적을 설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판단하여 대외적 입장을 설정한다는, 소위 독립자주외교노선으로 대외적인 입장을 변화시켰다…북한은 1980년의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등장하고, 후계자로 내외에 인상지웠다. 바로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과정이었다” (237~238쪽) (촌평: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중국은 어떻게 개혁개방의 길로, 북한은 어떻게 세습체제로 나아가게 됐는지, 그리고 그 다른 선택이 어떻게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됐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 “덩샤오핑에게 있어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여 정책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만이 문화대혁명기의 스스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명예회복’하여 ‘부활’하는 수단이고, 나아가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덩샤오핑에게 있어서 적극적인 인센티브가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 한편으로 김정일의 경우 개혁개방정책의 추진이 반드시 스스로의 권력 강화에 연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273쪽)

☞ “중국은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시점에서 이미 한국과 국교정상화까지 시야에 넣고 관계 긴밀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1985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공명당의 타케이리 요시카쓰(竹入義勝) 위원장은 중국 방문 직전 한국을 방문하고 전두환 대통령과의 회담 때 메모를 읽으며 ‘중국과의 국교를 열어, 사무소를 설치하고 무역을 추진하고 싶다’는 한국 측의 의향을 전한 데 대해, 덩샤오핑은 ‘한국과는 할 것입니다’라고 국교 수립을 시사했다고 한다” (296쪽) (촌평: 중국은 일찌감치 한국과의 수교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코 서둘지 않았다)

☞ “김일성이 중국에 체재하고 있었던 1991년 10월 8일, 장쩌민 총서기는 방중한 공명당의 이사다 코시로(石田幸四郞) 위원장과 중난하이에서 회담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서 ‘과거 함께 싸운 동지이고, 강한 유대로 맺어져 있지만, 중조는 동맹국은 아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자신들이 해결할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평화공존 5원칙에 기초하여 노력해 나가야 한다’라고 말하고, 중조 관계가 동맹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명언한 것이다. 장쩌민은 ‘앞으로 김 주석의 방문은 특별한 문제해결을 위한 방문이 아니라, 중국 북한 양측이 함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의견교환이었다”고 설명하였다” (312~313쪽)

☞ “소련과 한국의 국교정상화, 남북 유엔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으로, 이미 중국에 있어서 중한관계의 개선을 주저할 이유는 없어졌다” (317쪽)

☞ “중국이 중한 국교정상화에 대해 정식으로 북한에 설명한 것은 국교정상화의 약 1개월 전이었다. 1992년 7월 15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중한 국교정상화의 시기가 왔다는 장쩌민 총서기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김일성은 중국의 독립자주외교를 이해한다고 답했지만, 만찬회 등의 환영연은 없었다고 한다. 북한은 완전히 중한 국교정상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은 8월 접어들어 다시 첸치천 외교부장을 북한에 파견해, 중국의 입장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북한은 일단 중한 국교정상화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320쪽)

☞ “중한 국교정상화에 대해 북한 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북한의 NPT 탈퇴의 원인이 중한 국교정상화에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북한이 명확하게 자신들의 대외정책의 축을 대미관계로 놓고, 중국 스스로가 남북 어느 쪽에도 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의 저하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322~323쪽) (촌평: 한중 수교가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게 되는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더 이상 중국에 기댈 수 없게 되자 독자적인 핵 개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중국은 한반도의 두 개 정권과 관계에 고심하였다. 한중 국교정상화를 중국의 ‘배신’으로 취급한 북한, 국교정상화에 의해 곧 관계를 긴밀화할 수 있다고 기대한 한국, 어느 쪽도 중국에 대한 불만이 더해갔기 때문에, 중조 관계, 중한관계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다…(중국은) 남북의 이해가 충돌하는 문제에 대해 남북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아, 결과적으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는 구조에 빠졌다…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감히 말하자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쪽의 국가도 압도적인 영향력 행사를 바라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자신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아주 큰 상태에서 유지된 평화와 안전의 실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북한, 한국 모두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한반도의 안정이 남북의 협조관계를 포함하여 국제사회의 협조 가운데 관리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태일 것이다” (365~366쪽) (촌평: 중국의 남북한 등거리 외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중국은 북한을 통해 시작된 두 개의 위기, 즉 대량파괴무기문제로 상징되는 국제문제로서의 위기와 북한의 체제동요가 수반하는 위기에 대해-국제문제의 위기에 대해서는 6자회담의 틀로, 체제 동요의 위기에 대해서는 정상교류 등 양자 간의 틀로 대처해 왔다” (398쪽) (촌평: 국제문제와 양자문제로 나눠 북한을 관리하는 중국의 태도를 알 수 있다)

☞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입장이 되면 될수록 북한에 엄격하게 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이 증가하였지만, 여전히 미중관계가 완전히 신뢰관계가 없다면 북한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시키기도 어려웠다” (420쪽) (촌평: 중미관계에 완전한 신뢰가 형성되기 이전엔 중국은 결코 북한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 “(북한과 중국은) 각각 상대의 생각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반드시 스스로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북중 관계는) 60년 동안 정말로 이러한 반복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중조 관계는 양자의 그러한 어떤 종류의 ‘초조함’을 쌓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420~421쪽)

☞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중국의 북한에 대한 자세는, 국제적인 틀 가운데서 북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협력에 대해서는 양국간이 행함으로써 스스로 북한에게 영향력을 블랙박스 속에 봉인하고, 한편으로 스스로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만약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라는 기대가 중국으로 향해진 때에 그것을 거부하는 구실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스스로 북한에 대한 한정적 영향을 전제로 할 때, 중국에 있어서 아주 효과적인 것은, 이 ‘한정적이지만 일정한 영향력’의 정도를 국제사회에 명확히 하지 않고, 한편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강조하고, 북한의 국제사회에서의 행동에 대해 중국에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433~434쪽) (촌평: 중국은 항상 모호한 상태로 있는 것을 외교의 첫 번째로 꼽는다)

☞ “중국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영향력, 특히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첫째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이다라는 오해다…북한이 철저하게 거부하는 문제를 바꾸는 영향력은 중국에 없다…일본, 미국, 한국, 러시아 등과 비교할 때, 중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이 대북한 융화정책을 취하면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상대화된다…나아가 북한이 스스로의 대외정책의 중심을 대미관계에 둘 때, 미국의 북한정책에 의해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상대화되게 된다…둘째로 중국이 미일 측에 가까운 입장이라는 오해다…북한과 국제사회의 양자에 대해 자제를 촉구하는 중국의 자세는 변함없었다…중국은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와 중조 양국간 관계, 나아가 중국 국내의 상황에 의해 북한에 대한 자세를 결정하였다. 이 두 가지 오해로부터, 우리들이 바라는 형태로 북한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때, 중국은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들은 분석하게 된다…한반도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파악한 후 중국의 한반도 정책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다” (435~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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