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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파라과이 양계 왕 전영환씨(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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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스로 노동귀족이었음을 부끄러워하는 전영환씨가 이민하기 전까지 광산노조에 관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전씨의 고향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주동. 이웃에 대한중석 달성광산이 있는 광산촌이었다. 어릴 때부터 채광과 선광 등 탄광 일을 구경하면서 자라나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3세 때 삼촌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3년 동안 준비한 끝에 「오오사까」관서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도오꾜」공 학원 채광과로 전학, 광산 일을 배우게 되었다.

<운동 좋아해 유도4단 따고>
전씨는 남달리 몸이 숙성하여 16세 때부터 유도를 배웠고 성격은 괄괄한 편. 공부보다도 운동을 좋아하다가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22세 때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집안이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어서 2년 동안 운동을 계속하다가 호림광업(대한중석전신)달성 광산에 채광책임자로 취직했다. 말이 채광책임자일뿐 실은 광부 십장 비슷한 일이 맡겨졌다.
우락부락하고 성격이 거친 광부들도 유도4단인 전씨 앞에서는 감히 거역하지 못했고 「보스」기질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직책이 적격이었다. 해방되기 전해에 6세 아래인 김순호씨와 결혼했다. 4년만에 해방이 되자 할 일 없이 광산에서 나와 대구시 동구 두산동에 자그마한 사과밭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해방 후 사회 혼란기에 좌익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던 때였고, 동구일대는 대구좌익의 근거지로 전씨도 여러 차례 유혹을 받았으나 「공산당 노릇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을 뿐이다. 마침 대한청년단이 조직되고 단장에 조경구씨가 취임하자 전씨를 대구동구지부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농사일을 걷어치우고 좌익세력과 맞서다가 1947년 정초에 그들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한편 전씨의 가정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전씨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일찍부터 닦아왔다. 「테러」를 당한 이후 부모님들의 권유와 자신의 결심으로 목사 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30세 되던 해에 상경하여 당시 서울역 건너편에 있던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학장은 함태영 전부통령이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마음을 닦던 가운데 졸업을 앞두고 6·25사변이 터졌다.
부산피난지까지 따라 내려가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에 달성광산에 복직했다. 광부십장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 거칠대로 거친 광부들을 이끄는 목사로서였다.

<신앙 통해 광부권익을 옹호>
당시 광부는 1백50여명. 술 마시고 문란한 생활을 일삼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심성을 닦도록 인도하는 일은 보람스러운 것이었다. 3년 동안 목사로서 일한 전씨는 노동자의 참뜻이 어디 있는가를 깨닫게 됐다.
이때만 해도 광산의 일부 간부들이 노동자를 혹사시키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하기 예사였다. 핍박받는 노동자들은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박해를 참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계속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전씨는 신앙생활을 통한 양심의 가책과 타고난 불의와 싸우려는 성품 때문에 노동자의 옹호에 앞장설 참이었다. 이즈음 대한 노총 경북 도 연맹 위원장에 조경구씨가 피선되자 전씨가 대구지구연합회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전국광산노조위원장은 전진한씨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광산의 간부들은 노조조직낌새가 보이자 전씨에게 『전 목사는 교회나 지킬 일이지 무슨 노조운동이냐』고 압력을 넣었고, 일부광부들은 노조가 조직되더라도 별 도움이 없을 것이라며 냉담하기도 했다. 1년 동안이나 광부들을 설득한 끝에 준비위원회를 만드는데 성공, 총무과장 신삼휴씨가 위원장에, 전씨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달성광산의 광부들은 8백명이 넘어 이들이 결속할 경우 그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광산 측에서는 신씨를 지부장으로 밀었으나 투표에서 전씨가 98%의 지지를 얻어 지부장에 당선되어 광부의 대변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씨가 맡은 초기의 달성광산 노조지부는 전국광산노조가운데 비교적 모범이라고 평가되었다. 그것은 전씨가 종교생활을 통한 신앙적인 양심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씨는 1956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광산노조 제37차 총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국제광산노조총회에 참석>
전씨가 노조를 이끄는 동안 숱한 유혹이 있었다. 광산 측에서는 전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편의를 제공하면서 포섭하기에 혈안이 됐다. 전씨는 노조에 관계한 14년 동안을 스스로 헛된 삶이었다고 후회하고 있다. 뜻을 세워 뛰어든 일이었지만 타성에 젖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른바 노동귀족이 되어갔고 나중에는 오히려 그 생활을 즐기는 편이 되었다.
14년 동안 출근부에 도장 한번 찍지 않아도 총무과에서는 1백% 출근한 것으로 해주었고 술과 여자가 따르는 향응도 잦았다. 스스로 그 시절이 부끄러워 자상히 밝히기를 꺼린 전씨는 다만 『그때만 해도 내 신앙심이 단단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씨가 새 삶의 길을 걷게된 계기는 4·19였다. 대한중석에서 퇴직한 전씨는 잊었던 신앙생활을 되찾으면서부터 『과연 성실한 노동운동을 했으며 개인생활은 부조리하지 않았던가』고 뉘우치기 시작했다. 이때 얻은 반성은 참회하는 자세로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내 이마에 땀을 흘리자』는 결심은 전씨를 흙으로 돌려보냈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털어 서울 구로동에 밭7천5백평을 구입, 부인과 함께 채소농사를 지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배추·무우·고추를 가꾸면서 생의 의미를 배웠다. 수입이래야 보잘것없어 4식구의 양식을 겨우 댈 정도였지만 자연 속에서 산다는 매력이 대단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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