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죽어간 사람들 비명처럼 … 12초마다 물방울 소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난징대학살기념관의 한쪽 벽면은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생존자 1000여 명의 사진으로 채워져있다. 1937년 난징에선 60만여 명의 인구 중 30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사진 유봉걸 서울 화곡고 교사]
중국 난징 바이샤구(白下區)에 위치한 위안소 터. 번화가 바로 옆에 있지만 폐허나 다름없다. 2003년 북한 출신 위안부 박영심(2006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소임이 확인됐다. [사진 유봉걸 교사]

중국 난징(南京) 서쪽 외곽 2만5000㎡ 부지 위에 대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 관람객들은 기념관 초입부터 1937년 12월의 아비규환 속으로 들어간다. 목이 꺾이거나 이마에 총알구멍이 난 채 포개진 수백구의 유골에서 그날의 비극을 떠올리게 된다. 난징을 지키던 중화먼(中華門) 성벽은 처참하게 무너진 채였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당시 수도 난징에서 30만명을 학살했다. 중국은 85년 1만명의 유골이 발견된 만인갱(萬人坑) 위에 ‘난징대학살기념관’을 건설했다. “옛일을 기억하면 미래의 스승이 된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전 중국 총리의 유훈처럼 기념관은 당시의 참상을 생생히 드러냈다. 목청 크기로 유명한 중국인들도 기념관에선 숨소리를 죽였다.

 지난 19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의 현장 연수에 참여한 중·고교 교사 20여 명도 먹먹한 표정으로 기념관을 둘러봤다. 재단은 2010년부터 매년 현직 교사를 대상으로 동북아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부천 상동중 전정희(48) 교사는 “사망자가 발생한 간격인 12초마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희생자의 사진에 불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가르친 내용이지만 막상 와보니 훨씬 끔찍한 사건이었음이 피부에 와닿는다”고 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1만 명의 유골이 발견된 만인갱(萬人坑) 위에 세워졌다. 19일 현장 연수에 참여한 중·고교 교사들이 기념관 직원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김동훈 서울 삼정중 교사]

 이날 기념관엔 중국 정부가 초청한 외신 기자 40여 명도 함께했다. 일본 아베 정권의 고위 인사들이 잇따라 난징대학살과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발언을 하자 중국 외교부가 적극 대응에 나선 것이다. 주청산(朱成山) 기념관장은 “아베 총리가 직접 임명한 일본 공영방송 NHK의 고위 임원이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중·일 세 나라는 함께 노력해 전쟁 방지와 평화에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72년 중·일 국교 수립 뒤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17일 교사들과 함께 방문한 난징 바이샤구(白下區) 리지항(利濟巷)의 위안소 터로 가는 길은 눈비가 섞여 질퍽거렸다. 연건평 3500㎡에 이르는 허름한 2층 건물 8채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중국 정부는 2012년 11월 이곳을 난징대학살기념관의 분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3년말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위안소 건물을 철거하려고 했었다. 이곳은 땅값이 1㎡ 당 1만2000위안(약 211만원)에 달하는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해 11월 북한 출신 위안부 고(故) 박영심(당시 82세·2006년 작고) 할머니가 방문해 위안소라는 사실을 증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철거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중국 정부도 보존키로 결정했다. 분관은 올해 중 문을 여는 게 목표다. 현장 해설을 맡은 난징사대부고 신경란(52) 교사는 “그간 한·일 양국 간 갈등이었던 위안부 문제가 중국으로 점차 확산돼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답사 중 만난 중국 교사와 학생의 발언에서 ‘동아시아 평화’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다. 19일 오전 일행이 방문한 112년 역사의 난징사대부고에서는 ‘평화학’을 실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도입했다고 한다. ‘평화학’ 수업은 역사를 바탕으로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합과 평화를 어떻게 증진할지 가르친다. 2005년엔 한·중·일의 학자와 NGO가 함께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기술한 『미래를 여는 역사』를 교재로 채택했다.

 이 수업을 듣는 2학년 리준펑(李俊峰·17)은 “모든 국가가 애국을 강조하면 평화는 이뤄질 수 없다. 다른 나라를 배려하면서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신졘(盧新建·59) 역사과 교사는 “한·중·일이 서로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해한다면 어찌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며 “중국에서 만든 평화학 교재를 이번 답사에 참여한 교사들에게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난징(중국)=이정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