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새해 시정 방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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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정희 대통령은 14일 장장 2시간 40분에 걸친 연두 기자 회견을 갖고 새해 시정 방향을 밝혔다.
국정을 총 할 하는 대통령이 자주 회견을 갖고 그의 정책 실천 사항을 회고·평가하고, 새로운 정책 구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이러한 기대만큼 자주 회견이 있질 못했었다. 박 대통령도 이점을 감안했음인지, 질문은 단지 6개항에 불과했으나 충분한 시간 동안 중요 문제에 관해 대통령으로서의 소견을 소상히 국민에게 설명해 준 것이다.
연두 회견을 예상하고 항간에는 여러 가지 억측과 소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항설과는 달리 박 대통령이 회견에서 밝힌 바는 지금까지의 정책 기조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그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항설은 정치적 전기를 마련하는 어떤 중대한 제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물론, 그 같은 억측에 뚜렷한 근거가 있던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측이 구구히 나돌아야 했던 상황을 안타까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책의 변화는 반드시 연례 회견을 통해서만 표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기회인 대통령의 이번 공식 기자 회견 내용은 새해의 정책 기조인 것이므로 그 중요한 대목을 다시 음미 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개헌 문제다. 박 대통령은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현행 헌법을 개정할 수 없다고 거듭 그의 소신을 밝혔다. 『헌법만 고치면 만사가 해결 될 것이라는 말은 국민을 우롱하는 말이며,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옛날 헌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박 대통령도 「유신헌법」이 완전 무결하거나 이상적 제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 체제 때문에 국제적인 시련과 도전을 극복할 수 있었고, 북괴의 폭력적·군사적 도전 속에서도 국가 민족의 생존권을 지킬 수 있었다고 그는 평가 한 것이다.
유신 헌법하의 자유가 미국이나 서구의 자유와 같지 않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갖는 질서와 능률적인 정치 아래 정부와 국민이 일치 단결했기 때문에 작년과 같은 어려운 국제 환경을 이겨냈다는 자체 평가로써 현 헌법 질서를 고수하겠다는 소신을 뒷받침했다. 또 「프랑스」가 국난을 당했을 경우와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시행한 신생국이 그 민주주의를 어떻게 소화했는지를 열거하면서 유신체제를 계도적으로 해설했다.
작년부터 줄곧 논란되어 온 개헌 운동이나 체제 개혁 운동을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단지 그는 개헌만 하면 국민이 잘 살 수 있겠는가, 또 낭비와 혼란을 되풀이하면서 자주국방·자립 경제를 이룩하고 민주주의를 살려 나갈 수 있겠는가 고 반문하면서 옛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나라 망하는 길이라고 단언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또 북괴의 남침 위협이 없다는 안보관을 통렬히 힐난했다. 북괴의 위협이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초월한 하나의 객관 정세이기 때문에 어떤 동기 이건 간에 안보 태세에 유루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안보 태세를 더욱 굳건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라는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기회에 남북 관계의 기본적 정세 판단 그 자체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되는 일이 없기를 정치인들에게 촉구 하고자 한다.
둘째는 남북대화와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성의로 말미암아 남북대화에 아무 진전이 없었음을 박 대통령은 실토했다. 통일 문제에 관한 한 국민은 흔히 환상적인 기대를 갖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과 주변 여건으로 미루어 남북대화는 난제 가운데서도 지난의 사업이며, 더우기 통일 문제의 전도는 현 단계에서 아득할 뿐이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이번 회견에서 남북 문제에 관해 지극히 솔직한 소견을 피력했다. 『우리 세대에 통일이 될 지 어떨 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 세대에는 동족간의 전쟁은 없애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이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고 한 박 대통령은 그렇기 때문에 기대하기 어려운 남북대화에도 인내로써 노력을 다한다고 했다.
정치 지도자가 흔히 국민에게 환상과 신화를 심는 것을 통치 기술로 삼아 온 것은 역사가 말해 준다. 한국에서는 남북문제·통일 문제에 그 소지가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냉철하게 다룸으로써 현실적인 정책 방안을 제시했다. 상호 불가침 협정·남북한「유엔」 동시 가입 등의 수락 촉구가 그것이다. 특히 휴전 협정 효력의 존속을 전제로 「유엔」군사 해체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은 정세 추이에 현명하게 적응하려는 제의임을 누구나 긍정할 것이다.
또 박 대통령은 만약 북괴가 「유엔」에 동시 가입을 끝내 반대한다면 대한 민국만의 단독 가입에 반대나 방해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남북대화의 교착에서 결과 된 외교적 답보 상태를 타개하려는 전향적 정책의 시사로서 주목할 만하다.
세째는 경제 정책이다. 지금까지 정부의 경제 정책의 주조는 개발 정책이었다. 작년 이래의 세계적 자원 파동을 계기로 개발 정책의 수정이 불가피했으나 10여년 간의 성장 위주 정책은 그 공과의 폭이 너무 컸었다.
박 대통령이 이번 회견에서 안정 정책을 기본 시책 방향으로 천명한 것은 이 같은 객관 정세를 반영한 것이다. 안정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물가·고용·무역정책의 대강이 제시되었는데, 새해의 이 같은 안정 정책은 자원 문제에서 비롯된 불황의 극복책으로서 뿐 아니라 그 동안의 개발 정책에서 빚어진 모순의 수렴에도 기여를 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박 대통령은 소비가 미덕일 수 만은 없다는 것, 그리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앞에서 사치와 낭비하는 것을 수치로 알아야 한다는 소비의 윤리를 강조했는데, 착실한 경제정책의 집행과 지도층이 수범하는 새로운 사회 기풍이 이루어져야만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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