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시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내 앞의 권리>
성년시민. 나라를 되찾고「주권재미」의 임자로 성장한지 어느덧 30년. 장관·국회의원·기업인·농민·상인·교사·예술인·학생·여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민주시민으로서 주권을 누리기에도 이제 당당한 성년의 나이테에 이르렀다. 거울에 비친 성년의 자화상은『페만 끼치는 얼굴』인지,『도움을 주는 모습』인지 또는『직업윤리에 충실한 생활인』인지, 나아가『민주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민주시민』이었는지 자문해 봄직도 하다. 보다 발랄하고 창조적인 내일의 사회를 이룩하자면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찾을 줄 아는 책임있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세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제야말로 철이든「성년시민」으로 발판을 다져야 할 때이다.
월말을 맞은 ××은행예금 취급소. 은행 정문엔 전화료·취득세 등 갖가지 공과금을 납기안에 내려고 몰려든 주부들로 장사진이다. 중류 회사원 K씨(35)의 부인 H여인(32·약국관리약사)은 약국을 식모에게 잠깐 맡기고 은행에 갔다 온다는게 꼬박1시간동안 차례를 기다렸다. 『나이 어린 가정부가 행여 손님에게 덜렁 약이나 내주지 않을가』-신경은 온통 집안일에 곤두세워졌다. 흔히 눈에 띄는 월말 납세의 현장. 세금을 내는 시민은 갈수록 번거로와 지고 받아쓰는 쓱은 편해져 가지만 H여인은 번거로운 납세자의 의무만큼 세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 주부로서 의아해하게 마련.
그러나 선량한 시민들은 아무도 그 세금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따져볼 겨를을 갖지 못한다. 생활에 쫓겨온 탓이기보다 단 한번도 수익자로서의 혜택을 실감해 보지 못해봤기 때문.
이번 연말 「보너스」때 A사 B씨(35)는 회사의 선심으로 평생 처음 연말「보너스」를 3백%이상 받았지만 봉투를 받아든 기쁨도 한순간, 야릇한 손해를 본 듯한 울분을 느꼈다.
그가 받은「보너스」는 본봉 7만2천원의 3백30%인 23만7천6백원. 2만∼3만원의 세금이 나간다해도 최소한 20만원은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막상 실수령액은 갑근세· 8만5천1백원, 주민세4천2백57원 등 무려 8만9천4백5원이 세금으로 뜯겨나가 손에 쥔 것은 고작 14만8천원 뿐이었다.
매월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누구보다 기대에 부풀었던 부인 Y씨(32)는 실망이 너무 커 마치 『누구한테 돈을 뺏긴 기분이었다』고 했다. 주권자로서의 시민들이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보다는 항상 손해보는 기분에 젖어 있는데서 비롯된 실례의 하나.
종로구 동숭동 등 산동성 판잣집 자리에 74년이래 수백채의 시민 「아파트」를 무계획하게 세웠다. 그러나 와우「아파트」도괴사건이후 안전도 검사결과 불과 6년 후인 74년말 현재 전체 4백34동 중 82채를 헐어내고 1백여채를 보수해야한다는 문제아로 드러났다. 총 건립비 55억원에 지난해까지 들어간 보수·철거비만 20억원.
그러나 시민은 6년 전「아파트」들이 지어질 때 판잣집에서「근대화」로 발전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을 따름이지 불과 5, 6년 뒤 엄청난 손해를 본데 대한 권리주장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게 사실이다.
올해는 물가파동을 어느 해보다 피부로 실감한 한해. 「샐러리맨」의 상위에 오르는 두부가 자고 나면 15원에서 20원으로 오르고 아기들의 우유(시유) 도 불쑥 55원에서 65원으로 껑충 뛰었다. 농촌의 비료·사료대 등 안 오른 물건이 없었다.
생활의 안전만 물가당국의 말은 언제나『세계적 경제파동 속에 현실화가 불가피하다』는 앵무새 변명. 그러나 박봉에 혼자서 고통을 당해야 하는 아낙네들의 반응은 언제나 『살길이 막연하다』는 한숨뿐.
소비자의 안정생활을 지키기 위해 인상요인을 꼬치꼬치 따져보는 소비자「파워」는 아직도 없고『소비자는 왕』이라는 자위만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두부 1모에 1「엥」만 올라도 주부들의 항의「데모」가 터지고 신문의 머리를 장식하는 이웃나라 일본의 납세자 의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투표는 해서 무엇해. 모처럼 휴일인데 야외나 나갈 일이지』국민투표 등 주권행사가 잇달았던 72년말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 때 서대문구 대조동 시외「버스」정류장 등 각「터미널」엔「룩색」을 짊어진 젊은 남녀들의 행렬로 붐볐다.
인근 불광동·응암동 등 이른바 중산용「인텔리」층들이 많이 사는 투표장은 일부 주민들만 한산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이 서부지역의 투표율은 결국 50%이하. 뿌리깊은 무관심과 불신은「그 까짓거」하며 국민된 최고의 권리마저 예사롭게 포기하는 풍토를 부른 것.
지난5월 대한교련이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시내 국민교 6년생 1백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단적으로 나타난 한 예.
-「국민은 누구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지만 의무에 너무 충실하면 자기에게 손해가 오므로 적당히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절반에 가까운 47명이『예』라는 대답.
어린이의 마음이 언제, 어디서나 그 사회의 거울이라면, 지워야할 자화상 앞에 성년 시민을 마주 서게 하는 대답이다.
맡은바 해야할 일을 회피하고 권리·의무감을 얼버무리는 속성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무사안일 신조를 심기도 했다. 『참다운 권리생활은 민주사회 건설을 향한 진보적 참여의식과 꼬치꼬치 따져나가는 의무수행에서 비롯된다.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한완상 교수는 성년시민의 책임감 부재를 무엇보다 안타까와했다. <김형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