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수필 잔인한 갑인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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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화성 <작가>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그 해의 제야에서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하는 버릇이 생겼다. 새해의 첫새벽에 장안에 울려 퍼지는 보신각의 인경소리를 들으면서야 비로소 지난해의 무사하였음을 감사드릴만큼 나는 촌각의 운명이 선악의 현실을 좌우하는 각박한 세태에 젖어있는 약아빠진 인간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야가 되기까지에는 큰소리치며 이 해를 평가할 수 없고 다만 이 갑인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해였다는 것을 단언할 수는 있다.
이 해는 우리에게서 귀중한 일꾼들을 수없이 앗아간 것이다. 극계의 중추원로인 유치진씨와 박진씨, 시인학자인 이하윤씨, 언제나 순박한 인간 그대로의 멋진 시로 일생을 끝낸 신석정씨, 극작가인 오영진씨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예술인이 이해에 없어졌다.
더구나 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육영수여사의 비명에 가버린 비극이 갑인년 8월15일 광복절에 일어났던 사실마저 겹친 이해야말로 잔인한 한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듬직한 체구로 말수가 적은 유씨가 타계하기 바로 얼마 전에 예술원회의가 끝난 후 일부러 내 손을 잡고 『박 여사가 너무나 허약해지셨습니다. 너무나 수척해 졌어요. 특별히 몸조심하셔야겠습니다』하고 신신당부하더니 2월12일에 자기가 먼저 가버렸다.
이 교수는 덕성여대의 송 이사장의 고희잔치에서 만났는데, 언제나 웃음이 가득 찬 동안으로(그 날도 혈색이 좋았다) 식탁에 앉아 있다가 나가려는 나를 붙들고 『이봐요! 화성여사! 인생이 얼마나 길다고 이렇게 바삐 가? 여기 앉아요, 나랑 차나 한 잔 하게…』하며 굳이 잡는 것을 사양하고 그냥 왔더니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갑자기 별세하게 되어서 나는 이날까지 그 때 한 자리에서 잠깐이나마의 우정을 나누지 못한 나의 불민을 자책하고 있다.
신석정씨는 전주에 계시기 때문에 마음에 가득한 채로 우정을 나눌 기회가 없었고 새해마다 명필의 연하장을 받는 기쁨만은 계속해 왔는데 작년 문공부시상식에서의 악수를 최후로 영원한 고인이 되어버려서 언제나 석정이 있는 전주에 한번 가야지 하던 소망마저 끊어지고 전주에 대한 애착 대신으로 전주가 텅 비어 있는 듯한 공허감을 가지게 되었다.
박진씨는 독특한 「유머」로도 호인이지만 2, 3년 전에 위수술을 하여서 동병상련으로 서로 서로의 건강을 염려해왔는데, 금년 초여름에 어느 댁 만찬에서 하도 잘 잡숫길래 부러워했더니 어쩌면 그마저 그리 허무하게 가버렸을까?
써 내려오고 보니 슬픈 얘기뿐이어서 을씨년스러운 회고담이 되었으나 이해가 내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 무척이나 푸짐한 까닭에 크나큰 위안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나이만 먹었지 70평생에 뭐 하나대로 해 놓은 것도 없고 후배에게도 소홀하기만 했는데, 우리 여류문학인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내게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어서, 자주 뵙지도 못하던 각계의 여러 선생님들과 나의 친지들과 많은 문우들의 축복과 사랑을 몸에 넘치도록 받았다.
그 날 밤(12월21일)에 나는 여러분께 이런 약속을 했다.
『이 보배로운 우정에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의 인생과 문학의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잔인한 한해이긴 했어도 내 개인에게는 축복된 한해이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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