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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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만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무거운 잔을 올려 축배라도 들고 싶다. 그 지루하고 길고 어둡던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때없이 거듭되는 물가고의 시련 속에 그래도 지난해를 보내게 되었다. 물가는 이젠 숫자로 느끼기보다는 하나의 불안과 공포로 느껴진다. 식료품의 경우 지난 한해동안 무려 43.5%의 상승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물가에 마음을 놓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내일을 믿을 수 없는 이런 두려움 속에서도 장군처럼 견디어왔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어느 때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덧 없이 생명을 잃었다. 혹은 차륜 밑에서 혹은, 화염아래서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 누군가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도 했다. 생명은 존엄한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처럼 그것을 믿기 어려운 세상도 드물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속에서도 자신을 간수하고 오늘을 맞게되었다.
올해는 하늘에 기도가 충만한 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수도 없이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사람의 마음으론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초자연의 섭리에 의탁하는 심정들이었다. 하늘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어 주었는지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하늘에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신을 잃어버린 현대의 상황은 우리에겐 오히려 절박한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초자연의 존재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겸손은 도리어 생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의미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의 몸이 되어 있다. 많은 법률, 엄한 법률들은 우리에게 똑같이 많고 엄한 비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안위는 또 많은 사람들의 근심을 자아냈다.
우리는 지금 죄 없이 한해를 보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지, 부끄러워 해야할지…. 그러나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마음을 비로소 서로서로 갖게 된 것은 감사할 일이다.
이 세종을 맞는 숙연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 절규하고 있다. 혹은 옳다고, 혹은 아니다 하고-. 하지만 이것이 부자연스러울 것은 없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주장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지난해 우리는 나의 주장이 있듯이 타인의 주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선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독선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불편과 불만을 준다. 차선도 존중할 줄 아는 사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회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만을 보내며 신변의 잡사들보다도 더 큰 일들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기쁨을 찾자. 1974년은 실로 어둡고도 밝은, 아이러니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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