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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재능 <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작금 시단에선 「난해시」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것 같다. 난해시에 대한 문제가 새삼스럽게 대두된 것은 아니나 시와 독자와의 거리를 한층 인식하게된 근래에 와서 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문제로 박두한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독자를 위해 난해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꼭 있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을 갖게 한다. 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시라는 「장르」는 그 시대의 정신적 첨단을 걷는다는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난해시에 대한 견해를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작금 횡행하는 우리 시단의 난해시를 좀더 고찰하여 「진실한 난해시」와 「진실하지 못한 난해시」로 구분해 지적해 보는 것이 어떨까고…. 곧 시인의 상상력과 심도를 독자가 따르지 못해 난해한 것은 전자의 경우요, 난삽한 화술과 어휘들 (시인 자신도 모르는) 내지는 모호한 수사를 늘어놓아 난해한 것은 후자의 경우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단에선 진정한 난해시를 쓰는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진실하지 못한 난해시가 우리 시단에 범람하는 듯한 인상이 있으므로 그 극복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나 한다.
이달엔 주로 이런 관점으로 작품을 대하게 되었다.
조영서의 『살 속엔…』 (현대 문학)이나 『노을』 (한국 문학)의 경우는 이달에 읽은 작품 중 난해한 편으로 느껴졌다. 『살 속엔…』을 보면 「하얀 병상/만취된 무교동 얼굴」 등등과 같은 비교적 비약이 심한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러나 좀더 관조적 견지로 음미해 본다면 하나 하나의 「이미지」들이 내면 세계와 긴밀한 유기성을 가지면서 지적 추구의 상상력이 비약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을』의 경우에서도 「손 끝에/초침」 등등의 비약적인 「이미지」를 나열함으로써 민감한 추구력을 느끼게 하는데,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노이로틱」한 「패닉」의 지성적 작업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향림의 『골짜기』 (월간 중앙), 이수화의 『손의 침묵 33』 (한국 문학)의 경우는 비약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인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난해시를 극복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수화의 『손의 침묵 33』은 「리듬」의 「리프레인」이 일맥을 갖고 어떤 효과를 노린 것 같은데 어휘들은 순환된 감이 있어 부드럽게 읽히는 것이 좋긴 하지만 「리듬」이 너무 미끄러워 정착되는 관념이 희박하다.
혹 독자들이 『내용은 쉬웠어도 읽은 다음에 무엇을 말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난해시 쪽이 아닐까. 노향림의 『골짜기』는 이른바 현대적 난해시완 결부되지 않은 자기대로의 순연한 정서를 엮고 있는데, 오히려 이런 면이 현대에선 현명한 방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골짜기』는 그런 면으로 호감이 가는데,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장점을 의식적으로 가리려고 하는 인상이 든다. 가령 「한구석에 처박힌 개울물이/입벌린 채 신음소리를/덧없이 삼키고 있다」 등을 보더라도 부분적 수사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인 호흡엔 오히려 불필요한 지적가식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그것이다.
권일송의 『신작 특집』 (시문학), 김여정의 『신작 특집』 (현대 시학), 신동춘의 『가설 1』 (심상), 김종철의 『네개의 착란』 (문학 사상) 등도 이런 관점으로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권일송의 경우는 재래의 평이하던 시가 오히려 난해한 시로 접어든 인상이 든다. 특집 중 『환청 계절』이 그런 경우인데 「자궁 속의 고요/질척거리는 의식의 무한 궤적」 같은 귀절은 의식적으로 난해하게 만든 듯하다. 그가 즐기는 현실에 대한 해학적, 풍자적 고발 의식은 여전하다.
신동춘의 『가설 1』은 그가 갖는 정서의 미적 표현이 여전하여 퍽 애착을 느끼게 한다. 물론 난해시완 무관하게 보인다. 수사에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기교보다는 순탄한 육성을 더 기대하고 싶다. 「포에지」가 견고한 김여정, 지적 처리가 민감한 김종철의 경우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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