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제42화>주미대사시절(7)|양유찬(제자 양유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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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휴전반대>
외교한국정부의 휴전반대운동이 끝까지 관철되기엔 대세가 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 박사는 미국으로부터 방위동맹이나 중공군의 철퇴보장 같은 댓가를 얻어내기로 대미교섭의 방침을 바꾸었다.
이 같은 이박사의 생각은 「클라크」「유엔」군 총사령관에게 피력되었고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친서로 전달되었다.
휴전에 대한 미국 측의 보강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두 대 통령간에 몇 차례 서신이 교환되면서 휴전협상은 진전을 보았다.
53년6월초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대장과 북괴수상 겸 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그들은 한국전에 파견된 중공정규군을 그렇게 불러 속임수를 썼다) 사령관 팽덕괴 간에 휴전협상의 마지막 난관이었던 포로교환협정이 합의, 서명됐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휴전 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미국 측은 구체적인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유엔」군측이 공산 측에 비밀리에 제시했다가 누설된 포로 교환안 협안은 우리정부를 크게 분격시킨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그 내용은 ①본국송환을 거부하는 약4만7천명의 포로를 인도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등 5개국으로 이루어지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관리하에 두며 ②이들 포로가 남한에서 중립국감시하에 있을 동안 인도군이 감시하고 ③공산측 대표가 포로수용소를 방문, 4개월간 포로들에게 송환설득을 벌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휴전반대국민운동에 불을 질렀다. 노도 같은 휴전반대「데모」가 전국을 휩쓸었다. 드디어 이대통령은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석방시켜 미국정부에 맞섰다.
반공포로의 석방은 다된 휴전협상에 재를 뿌린 셈이 됐다. 포로석방조치는 미국이 한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체결하는 어떤 휴전협정도 파기할 수 있다는 강력한 우리의 의사를 행동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미국정부의 경악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를 불러 항의하는 한편, 「아이젠하워」는 즉시 이대통령에게 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이 「메시지」에서 『각하가 현재와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에 따라 생기는 조건아래서는 「유엔」군사령부가 각하와 공동작전을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미리 예견한 것이어서 별로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반공포로의 석방조치는 미국으로 하여금 이박사의 단호한 의사를 인식시켰고 그래서 미국정부는 이박사가 더 이상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부랴부랴 「로버트슨」국무성 극동담당차관보를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파한 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대통령에게 한국전쟁처리 및 장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초청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를 사절했다.
대신 「덜레스」국무장관을 한국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덜레스」가 바쁜 때여서 「로버트슨」특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로버트슨」특사는 18일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10여차례나 이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휴전동의를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결국 「로버트슨」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시한부 휴전부 방해』의 언질을 받았다.
대신 미국은 ①휴전성립 직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②2억「달러」와 부흥원조와 상당한 장기경제원조를 제공한다 ③휴전 후 90일이 지나도 정치회담에서 한국통일문제에 대한 구체적 성과를 보지 못할 땐 한·미 양국이 회의에서 철수한다 ④한국지상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한다고 약속, 이를 이대통령-「로버트슨」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국군증강문제는 이미 「맥아더」「리지웨이」「클라크」 등 역대 「유엔」군사령관들이 미국정부에 건의했고 이 건의에 따라 「아이젠하워」대통령이 20개 사단 65만5천명의 한국군 「실링」과 장비확충계획을 승인해 놓았었다. 「로버트슨」특사가 이를 공식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로버트슨」특사에 앞서 「아이젠하워」대통령은 경제특사로 「타스카」를 보내 휴전후의 경제원조를 약속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역사적인 한국휴전협정은 한국정부의 「부방해」약속아래 한국대표의 서명 없이 기이하게 체결됐다.
휴전직후 나는 「필라델피아」강연회에서 『휴전협정이 미국의 오산으로 체결됐으니 다시 후회하기 전에 파기해야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이 얘기를 듣고 놀란 「클라크」사령관은 새벽3시 이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양대사가 휴전협정을 파기하자고 주장해서 내 입장이 대단히 곤란하다』고 항의했다.
그렇지만 이대통령은 『당신에겐 입장이 문제지만 우리에겐 3천만국민이 죽고 사는 문제』라며 나를 두둔했다. 이 얘기는 후에 이박사에게서 들었다.
휴전협정에 「사인」하고 집에 돌아온 「클라크」장군이 응접실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그의 부인에게 『일을 잘못한 것 같다. 오늘 휴전협정에 서명했다』면서 괴로워하더라는 「클라크」부인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클라크」장군 자신도 내심으로는 휴전을 반대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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