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hi] 도전 받는 올림픽 애국주의 … "대한민국보다 김연아 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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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러시아 소치에는 ‘국가대표 응원단’이 없다. 대신 ‘피겨 여왕’ 김연아(24)의 은퇴 경기가 가까워지자 한국에서 온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의 시간과 비용을 들인 김연아 팬들이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21일 프리스케이팅에서 검은색 드레스를 입는다. 사진은 지난 1월 고양에서 열린 전국 남녀 피겨종합선수권 프리스케이팅 장면. [중앙포토]▷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8일 인터넷은 ‘김연아 대 대한민국’의 대결구도로 시끄러웠다. 김연아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한 기업이 지난달 김연아를 격려하는 광고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한 네티즌이 이에 대한 패러디 동영상을 만들어 논란이 됐다.

 이 업체의 광고 영상은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너는 1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강력한 카피를 썼다.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김연아에 대한 찬사를, 그리고 그가 금메달을 따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국가주의(국가를 가장 우선적 존재로 인식)를 내세워 대중의 감성을 파고드는 기법이다.

 이 광고보다 패러디 동영상이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 영상은 ‘당신은 피겨 약소국 선수 김연아입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챔피언이고, 어린 후배를 위해 뛰어오르는 선구자입니다. 당신은 김연아입니다. 당신이어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너’ 대신 ‘당신’이란 존칭을 썼고, ‘대한민국’ 대신 ‘김연아’로 주체가 바뀌었다. 금메달을 기대하기보다 그저 김연아여서 고맙다는 충심(忠心)을 담았다.

 패러디 동영상에는 과거 김연아가 추운 빙상장에서 시린 귀를 녹이며 달리고, 많은 사람 속에서 훈련하다 넘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 국제대회에서 예상 외의 낮은 점수를 받고 아쉬운 듯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도 있다. 인프라가 열악하고, 세계 피겨계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김연아가 ‘피겨 여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패러디 동영상엔 김연아가 성공하기까지 국가가 지원한 게 별로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팬들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김연아여서 응원한다”는 것이다. 한국 대표팀보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29·한국명 안현수)을 더 응원하는 기현상이 일어난 데 이어 ‘반(反)국가주의(국가가 개인에 우선하는 것을 반대)’ 2라운드가 이어지고 있다.

 체육철학자 김정효 박사는 “지금까지 올림픽은 국가 간 경쟁이라는 프레임으로 유지됐지만 이젠 식상해졌다. 사람들은 개인의 성공신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김연아 광고에 대한 반감은 선수가 혼자 이룬 걸 국가가 가로채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올림픽에서 민족주의의 단물이 빠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올림픽과 월드컵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통한 국민의 결집은 점차 약화하고 있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 대표팀 구성에 애를 먹었던 김인식(67) 감독은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대표팀 합류를 꺼렸던 코치·선수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내셔널리즘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18일 금메달을 따낸 여자 쇼트트랙 계주팀의 화교 3세 공상정(18)은 깜찍한 외모로 주목받고 있다. 젊은 팬들에게 국적은 상관없다. 경제위기와 세대 갈등이 계속되면서 국가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인식이 나빠졌다. 이들은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해준 게 뭐냐”고 묻는다.

 ‘김연아 대 대한민국’의 구도를 반국가주의로 단정하기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계명대 임운택(사회학) 교수는 “우리가 국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김연아를 응원하는 많은 팬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김연아’라고 생각한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일본)를 비교할 때도 한·일전 느낌이 나는 이유”라며 “선수들이 개인 성적으로 경쟁하지만 국가 없이 올림픽에 나갈 순 없다. 국가대표를 강조하는 걸 민족주의라며 폄하할 건 아니다”고 말했다. 연세대 류석춘(사회학) 교수는 “예전처럼 모두가 국가주의자였던 것보단 다양성이 있는 게 좋다. 하지만 국가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된다. 이런 이들이 절반을 넘으면 공동체가 와해된다”면서 “아직은 일부의 움직임인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구성원들이 개인주의적 가치만 추구한다면 일종의 사회해체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소치=김식 기자,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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