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카쿠에서 위안부로 … 중국, 대일본 전선 넓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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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와 학계·예술계 등이 최근 종군위안부 문제를 적극 거론하며 과거사 영역에서도 일본에 대해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중국은 피해국들이 이 문제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1945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일본군의 위안부로 잡혀 있던 중국·말레이시아 여성들. [사진 중앙포토·중신왕]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중국 윈난성 쑹산(松山)엔 일본군 56사단 병력 6000여 명이 주둔했다. 이들의 성노리개 역할을 위해 마련된 23개의 위안소엔 한국과 중국 등에서 끌려온 젊은 여성들로 채워졌다.

 현재 이곳에선 쑹산의 위안부들을 다룬 영화 제작이 한창이다. 배우 출신 뤼샤오룽(呂小龍)이 각본·감독을 맡은 ‘여명의 눈(黎明之眼)’이다. 위안부 소재 한국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일본군이 1937~38년 저지른 난징 대학살 기념일인 지난해 12월 13일 촬영을 시작했다. 같은 날 미술가 위안시쿤(袁熙坤)의 조소 작품 ‘위안부’도 이곳에서 공개됐다.

 뤼 감독은 중국 중앙방송(CC-TV)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젊은이들이 종군위안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일본인 위안부는 돈을 벌러 자발적으로 간 것이고 중국과 한국 여성들은 강제로 끌려가거나 속아서 간 것”이라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라고 했다.

중국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 ‘대일살롱(大一沙龍)’으로 쓰이던 건물. [사진 중앙포토·중신왕]

 지난 8~9일 중국 상하이사범대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엔 한국과 중국·일본에서 30여 명의 학자가 참가했다. 그간 주로 한국이 목소리를 높여온 위안부 문제에 중국 학계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호응한 일은 이례적이다. 이 대학 쑤즈량(蘇智良)·천리페이(陳麗菲)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 위안부 수가 30만 명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이는 5만~20만 명으로 추산하는 한국인 위안부보다 많은 수”라고 말했다. 회의에선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입증하는 문건들이 공개됐고 3국 학자들이 이 기록들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이처럼 최근 위안부 문제에 중국 민·관·학계의 대응이 뜨겁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국가 학술지원 프로젝트에 위안부 관련 연구를 포함했다. 호주에선 지난 10일 한국과 중국 교민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공동 건립키로 합의했다.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최근 칼럼을 통해 “중국·한국 등 일제 피해국들이 위안부 문제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안시쿤과 조소 작품 ‘위안부’. [사진 중앙포토·중신왕]

 중국은 그간 정부를 중심으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 등 주로 영토·안보 문제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웠다. 2008년 12월 처음으로 중국 해양감시선이 센카쿠 영해를 침범한 이래 지금은 수시로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지난해엔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해 일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침략에 관해선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왔다. 민간 차원에서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놓고 일본 우익들과 논쟁을 벌여왔지만 정부의 대응은 거의 없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72년 9월 중·일 국교 수립 때 양국이 맺은 조약에 근거한다. 당시 양국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중국은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중·일 연합성명’에 명기했다. 그간 중국의 경제 성장에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이 필수적이었다는 상황도 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지난해 일본 정권이 우경화 정책을 밀어붙이자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조세영 전 외교부 동북아국장(현 동서대 교수)은 “중국이 ‘안보’라는 리얼리즘(현실)의 영역을 넘어 ‘역사’라는 심벌리즘(상징)의 영역으로 전선(戰線)을 확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비합리적 강경·우경화가 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걷잡을 수 없는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선 현재 민간 차원의 배상 소송을 추진할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미쓰비시 등 당시 일본 기업들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한 중국 피해자와 유족들이 현재 중국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 중이다. 위안부 전문가인 쑤즈량 교수도 “대일 배상문제 해결에 더 많은 법률적 역량이 요구된다”며 소송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과거엔 중국 정부가 이런 움직임을 제어해 왔지만 현재는 이를 묵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과거사 문제에 국제적 지지 여론을 모으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난징 대학살 현장을 둘러보게 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해 19일부터 1박2일 과정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올해 초엔 외신기자들이 선양의 연합군포로수용소와 학살사건기념관 등을 취재토록 지원했다. 지난달 하얼빈에서 안중근 기념관을 개관하고, 한국 정부가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국제 공동연구를 추진하겠다고 하자 곧바로 “지지한다”고 나서는 등 한국과의 공조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각 국가가 ‘정확한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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