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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반문화(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얼핏 봐선 알거지들이다. 더벅머리에 청바지. 이건 언제부턴가 이곳 일부 젊은 세대들의「유니폼」처럼 됐다. 서구 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이나마 동구에서도 그렇다. 청바지도 누더길수록 좋다. 워낙 털 많은 인종들이라 이 끝에다 무더기 수염들까지 늘어뜨리고 있고 보면 서울에서 온 어느 점잖은 양반이 『이 나라엔 웬 거지들이 이렇게 많소!』했다는 게 무리도 아니다.
어찌 보면 좀 우습다. 도대체 소위 청바지 문화다, 그 한 변형으로서의 「팝·컬처」다 하는 따위들이 나타나게 된 동기의 하나가 지금까지의 서구사회의 물질적·정신적 환경의 규격성에대한 반항이나 권태에 있었다면 그런 충동의 외형적인 표현이 왜 또 이렇게도 규격화되다시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 그들을 묶어놓은 공감이나 일체감 같은 것이 그들로 하여금 신분증격인 「제복」을 자발적으로 걸치게 할만큼 강렬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야 어떻대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런 「유니폼」이 오늘날 서구의 정신상황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조조 할아버지 전부터의 선조 대들을 물심양면에 걸쳐 지배해온 지금까지의 생활양식에 대한 어떤 권태감을 내용으로 하고 있대도 괜찮다.
지난 2, 3백년동안 그들 선조들은 엄청난 창의와 노력으로 오늘날 놀랄만한 서구물질문명의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젠 사람이 달 표면을 걷고 서게까지 됐다. 자연이 인간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그게 나쁠 건 없다. 굶주림이란 그들 주위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소비가 미덕」이란 말까지가 나오게도 됐다.
소비는 많이 할수록 좋았다. 소비가 가다간 「소비하기 위한 낭비」였대도 상관없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그랬다.
그러나 세상엔 공짜란 없다. 자원이 누구에게나 무한하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소비한다」는 단어는 실상은 경쟁한다는 뜻을 가졌다. 이런 경쟁에서의 낙후는 인생에서의 낙오다. 옆집 「존」가에 자가용차가 생겼으면 우리도 가져야 한다.
그래 그들은 평생을 두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소비해온 게 지금까지의 서구다.
청바지들에겐 그게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어째 일생을 허덕여야 그게 행복하고 값어치 있는 거냐. 그래서 그들은 머리를 길렀다. 제일 값싼 청바지를 입었다. 그저 한 개의 생산자·소비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존」가의 아들녀석이 무엇을 입었건 상관할게 아니다. 그는 이미 그저 경쟁상대자이기를 그쳤다….
이쯤으로 그게 청바지다 한다면 그들에게 필경 야단맞을는지 모른다. 청바지는 아직은 관절 있는 「발언」이기 보다는 하나의 소극적인 항거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하긴 나이가 차 사회에 나서면서 그들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청바지를 벗는다. 「부르좌」적 입신양명의 유혹은 아직도 크다. 그러나 그렇게 바지를 벗는 순간 그는 청바지기의 모든 것과 하직을 해버리는 것인지. 그건 두고 볼 일이다. 【박중희 주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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