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실린·쇼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어떤 환자가 회사를 찾아갔다. 진찰을 끝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큰일 날뻔 했군요.』
『왜요, 굉장히 나쁜가요?』환자는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게 아니고, 오늘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뻔 했으니까요』
의사의 부도덕을 꼬집은 얘기지만 그 보다도 「의약과신」을 빈정댄 풍속도 곁들여 있다. 모든 생물의 구조는 원초적으로 자연회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투약은 말하자면 그 자연 회복력에 박차를 더 해주는 구실을 할뿐이다.
오늘날 의와 약의 발달은 「자연의 섭리」를 불신하는 부작용도 아울러 동반하고 있다. 철부지 아이들도 무슨 병엔 무슨 약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외고 있다. 자신의 병을 스스로의 무지한 판단에 의해 보약으로 다스리려고 한다. 우리의 주택가에까지 약방이 파고드는 것은 그런 세태의 일면이다.
반면 약에의 과신풍조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병에 너무도 민감하게 만들었다. 약이 없으면 병은 끊임없이 진전되어 곧 파국에 이를 것 같은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문명 「알레르기」라고나 할까.
그런 문명「알레르기」속에서 각광을 받는 약이 항생물질이다. 항생물질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인 것이 「페니실린」일 것 같다. 「페니실린」은 1929년 영국의 「A·플레밍」에 의해 발견된 일종의 곰팡이 물질이다. 이 곰팡이는 포도상구균을 억제하는 데에 놀라운 효과를 보여준다.
오늘날 기관지염이나 폐렴에 의해 사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항생물질의 공헌이다. 영국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지 않은 것은 「페니실린」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젠 고인이 된 「윈스턴·처칠」 수상은 그 무렵 폐렴을 자주 앓았었다. 그의 생명을 이어준 것이 이 항생물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약이 그렇듯이 항생물질도 부작용을 갖고 있다. 「페니실린·쇼크」는 그 중의 하나다. 어떤 사람의 체질은 「페니실린」에 대한 과민증이 있어서 그것이 체내에 들어가면 몇 분 사이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난다.
끝내는 의식이 몽롱해지고 허탈감에 빠져 생명까지 잃는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극히 드물긴 하지만 주변에서 때때로 볼 수 있다. 의사들은 이와 같은 「쇼크」를 미리 알아내기 위해 「스킨·테스트」와 같은 사전실험을 해본다.
문제는 진찰의 과정이 없이 맘대로 보약을 살 수 있는 무책임한 제도에도 있다. 고객의 주문만으로 약품이 매매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지와 무책임의 사고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은 의·약 분리만을 외칠 수도 없다. 환자들은 진료비에 쫓겨 병원을 외면하고 약방을 찾게 된다.
국민의 복지는 경제성장의 「그래프」에만 있지는 않다. 건강복지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의 부조리는 「페니실린·쇼크」에서도 볼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