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억원의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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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셀라시에」황제를 처형하면 미국이 군·경 원조를 끊게 되리라는 경고설이 나도는 가운데 그는 「스위스」은행에 몰래 예금해 두었던 4천억원을 군사정부에 넘겨주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대가로는 4천억원도 비싸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나, 우리네 서민의 꿈이라면 단위가 고작 천만원이다. 우리보다도 민도가 낮은 「이디오피아」의 서민이라면 단위는 백만원대일 것이다.
하기야 「셀라시에」황제는 「솔로몬」왕의 후손이다. 망명 후에라도 위신을 차리자면 억대쯤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명이 얼마 안 되는 그에게 4천억원의 현금이 필요했을까? 그런 천문학적인 거금을 민생을 위해 썼다면 죽는 날 까지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지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비극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톨스토이」의 우화에 이런 게 있던 것 같이 기억된다.
『어떤 사람이 쓰러지지 않고 뛴 만큼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는 말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힘이 지쳐 쓰러지자 그는 지팡이를 앞으로 뻗으면서 이 지팡이 끝까지가 내차지』라고 외쳤다.
사람의 욕심엔 이렇게 한이 없다는 고화인 것이다. 사람들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돈이란 사실은 그리 많은 게 아니다. 그 한도를 넘은 돈의 쓸모는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체면도 잊고 염치도 저버리고, 때로는 수단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 한다.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다.
「프랑스」에 「사라·베르날」이라는 명배우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침대 밑에 큰 궤짝을 두고, 그 속에 금은화를 가득히 넣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그 궤짝을 열어 금화들의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수전노는 아니었다. 돈에 눈이 어두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끼니가 어려울 만한 가난 속에서 자라났었다. 어릴 때 가장 뼈에 사무치도록 아쉬웠던 게 돈이었다. 그런 쓰라린 추억을 그녀는 금화의 짤랑 소리로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이다. 「사라·베르날」의 경우는 우리에게 오히려 깊은 동석을 자아내게 한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것은 놀랄 만큼 적은 재산뿐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탐욕에 한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지위가 높으면 높을 수록 더 탐욕적이 되어간다.
아무려나 그래도 4천억원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가 망명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보면 올해는 원수들의 수난시대인 것만 같다. 돈이 아니면 사생활이 화근이 되어 실각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최근에는 또 「프랑스」대통령의 사생활이 문제되고 있다. 『위대한 재능의 소유주는 대체로 동물적 행위에 있어서도 활발하다』고 한 「H·테일러」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다만 위대한 재능의 소유자도 아닌데 동물적 행위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늘어나니 더욱 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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