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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아베의 비전과 용기를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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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엄선된 ‘국빈 리스트’에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오바마 2기 행정부 들어 첫 국빈으로 백악관을 찾은 ‘싱글 대통령’을 위해 오바마 부부는 미국식 국빈 만찬의 진수를 보여줬다.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 대형 천막을 쳐서 임시 연회장을 만들고, 350명의 손님을 초대했다. 오바마는 “비브 라 프랑스(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건배를 제의했다. “영국 대신 프랑스가 유럽에서 미국의 최고 맹방이 된 거냐”는 질문이 프랑스 기자로부터 나올 만큼 오바마의 환대는 인상적이었다. 오바마는 “그 질문은 내 두 딸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응수해 올랑드를 즐겁게 했다.

 프랑스는 미국의 가장 오랜 동맹국 중 하나다. 미국의 독립전쟁 때 프랑스는 미국을 도왔고, 제1·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이 프랑스를 위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전후 두 나라는 애증(愛憎)의 관계였다.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맞서 프랑스는 반전(反戰) 진영의 선봉에 섰다. 백악관 구내식당 메뉴에서 ‘프렌치 프라이(감자튀김)’가 사라지고, 대신 ‘프리덤 프라이’가 등장했을 정도로 프랑스라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는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호흡을 맞추며 2중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11년 리비아 사태 때도 미국은 뒤로 빠지고 프랑스가 앞장을 섰다. 무아마르 카다피 추종 세력에 대한 공습을 프랑스가 주도했다. 시리아 사태와 이란 핵 문제에서도 파리는 워싱턴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슬람 반군 세력과 내전에 빠진 말리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군사개입을 주도하고 있는 나라도 프랑스다. 소말리아·차드·코트디부아르까지 아프리카에만 6600명을 파병 중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미국이 할 일을 프랑스가 대신하는 모양새다. 좋게 보면 역할 분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웃소싱’이다. 부담을 프랑스에 떠넘겨 미국이 얻는 이익에 비하면 올랑드 접대에 쓴 돈은 코끼리 비스킷이다.

 오바마가 유럽을 상대로 추진 중인 아웃소싱 외교의 또 다른 축은 독일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독일은 ‘와이 낫(Why not)?’이다. 지난달 말 뮌헨 안보회의 기조연설에서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국제분쟁에 대한 독일의 군사개입 확대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과거사에 대한 독일의 원죄 뒤에 숨어 세계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가우크 대통령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오바마가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아웃소싱 외교의 중심축은 일본이다. 말이 좋아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이고, ‘재균형(rebalancing)’이지 실상은 일본을 앞세워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통해 중국을 견제할 속셈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지만 내심은 이 기회에 지난 70년간 일본을 옥죄어온 샌프란시코 평화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교전권을 가진 정상국가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개헌이나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움직임을 보는 주변국의 시선은 싸늘하다. 독일에 대한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과를 통해 거듭난 반면 일본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가우크 대통령이 한 말을 아베 총리가 했다면 동아시아는 또 한 번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을 것이다.

 전후 체제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일본의 효용가치가 높아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도 사실이다. 미국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중국과도 협력적 관계를 구축한다면 일본은 미·중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미·일 동맹을 가로축, 한·중·일 3각 협력체제를 세로축으로 할 때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외교지평은 몰라보게 확장될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집단동맹체제와 유럽통합이라는 두 축을 통해 유럽을 이끌고 있는 독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반성, 영토 문제를 먼 훗날로 미루는 용단.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 비전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아베 총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