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대고통 향한 양심의 절규『차로』|수회 겪은 역사에 대한 반성『장의사지』|자업자득한 세도 배의 말로『벌거벗은 임금님』|김병걸(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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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바르지 못한 세상에서 붓을 들 때 양심적인 작가라면 그는 응당 시대의 아픔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육 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홍 씨의 『차로』(현대문학)는 시대의 고통에 대한 양심의 절규이다. 까닭 없이 짓밟히고, 억눌리고, 쫓기고, 위협받는 삶과 그 앞에 우뚝 솟은 첩첩한 현자의 산맥과의 교차지점에서 과연 누가 현깃증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핵이다.·
욕심 없이 분에 맞는 삶을 누리고자 하는 <공민>의 착한 염원은 과거의 악몽에 수시로 차단되며, 또한 질서가 무질서에 삼켜지고, 정이 사에 억눌리고, 비 가치가 가치로 둔갑하는 사회상의「카오스」앞에서 완전히 난파된다. 약자에게 실오리 같은 꿈의 재기도 허락지 않는 대신, 나랏돈 수10억 원을 먹고 수갑을 차도 재기의 기회가 얼마든지 열리는 세계에서<공민>의 허약한 정신이 분열증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공민>과 그리고 이 명칭이 암시하는 바와 같은 서러운 중생들은 뚫리지 않는 상황의 암벽에 부닥쳐 결국 <안 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친다>는 격이 되며, 운명의 파탄을 타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수 없음에서 빚어진 것으로 폭삭 주저앉아야 하면서도, 그러나 그 절망적 체념 속에는 끝내 옳음을 위한 몸부림이, 세찬 파고로 우리의 가슴을 때린다. 이주홍 씨는 지난달의『돌』에서 그러했듯이 『차로』에서도 작가의 정신적 노익장을 현시하고 있다.
신상웅 씨의 『장의사지』(문학사상)는 사료를 바르게 재평가해보려는 결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소설 속에는 또 하나의 소설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사가 등장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합은 민족사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작가는 엄연한 이 정사에 도전한다.
즉 신라왕 김춘추의 꿈에 나타난 장춘랑과 파랑 두 전사한 장군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신라의 백제 정복을 비판한다. 그것은 당의 외세를 불러들여 동족상잔의 비극 외에 다름 아니다. 신라의 반도 통일정책이 대의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어쨌든 삼국 내전에 이득을 보는 것은 당 제이다. 사실 백제를 굴복시킨 나·당 연합군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이 땅에 당 제의 도독 부를 도처에 열립케 한 계기 밖에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 쫌 되면 신라는 반도강점의 야욕에 불탄 당 제에 볼모가 되어 꼭두각시 싸움에 내몰린 격이 되지 않는가. 민족의 과거사에 대한 이와 같은 『장의사지』 의 진맥은 수없이 외세에 시달려왔던 민족적 수모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암시가 또한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의는 그릇 된 역사를 미화한 관선적 사가들의 아세적 사관을 깊이 찌든 점에 있다.
백도기 씨의『벌거벗은 임금님』(문학사상) 은 익살과 경구를 간간이 뒤섞어 가면서 농·부·세의 삼각 관계를 3형제의 인물을 통해 진단한다. 삼 형제는 혈육간이라기보다 한국적 인간의 3가지「패턴」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맏아들은 선친의 유언대로 객기나 잔재주 부림 없이 농 본을 신념으로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한국적 농민 상이다.·
둘째아들은 개인적 향락과 부의 축적을 위해서 조국과 민족도 버리고 일인으로 귀화하는, 혹은 타국인이 되지 못해 안달 난 못된 족속을 대변한다. 막내아들은 시대 변천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세도의 물줄기를 타는 아세 배의 전형이다. 그는 이를테면 객기의 저돌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세도 배의 무참한 말로를 도형 하여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 된-권세의 자업자득을 보여준다. 세가 꺾이었을 때, 그것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처량하기 그지없는 낙루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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