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한국 경제창설(25)<제41화>-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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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7년11월14일 「유엔」총회 전체회의에서는 한국 독립안이 가결되고 전 한국에 걸쳐 국민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48년4월3일 총선거 실시 일을 5월10일로 결정, 공고했다. 이에 앞서 48년1월8일 총선 감시를 위해 「유엔」이 한국위원회 위원단 선발대가 내한했다. 당초 선거 예정일은 5월9일이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하루가 연기됐다.
공고에 따른 후보자등록 마감은 그해4월16일로 공고일부터 꼭2주일이 남아있었다.
당시 국내정세는 제주도에 폭동이 일어나 경찰서가 습격 당하고 남노당의 지령에 의한 방화· 살인· 폭동 등이 곳곳에서 일어나 치안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좌익진영 및 중간파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적극 반대하고 본격적인 선거 방해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즈음 경무부와 미군CIC에는 북한의 북노당이 선거방해를 위해 남한의 남노당에 내리는 지령들이 연이어 정보자료로 수집됐다.
이지령의 내용가운데는 『만약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경우에는 선거전 도중이나 투표당일에 대구 10월 폭동이상의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라』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분석한 조병옥 경무부장은 우도「호텔」로 「하지」장군을 찾아갔다.
조부자은 「하지」에게 『현재의 2만5천명의 국립경찰만으로는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치안 유지를 할 수 없다. 1백만명의 보조 경찰제도를 설치토록 해달라』 고 건의했다.
이 말을 들은「하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노-』 『노-』를 연발했다.
「하지」장군은 설사 자신이 조부장의 의견에 찬성한다 하더라도 미국무생이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장군은 만약 인구 2천만명 밖에 안되는 남한에 1백만명이나 되는 방대한 숫자의 경찰 보조원을 둔다면 경찰국가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조부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러는 동안 후보자들은 등록을 하고 유세에 나서는 등 선거운동이 활발히 진행됐다.
어느 후보자는 지게꾼에게 「마이크 를 지워 골목길을 누비며 연설을 했고 어느 입후보자는 당국이 입후보자에게 지원해 주는 현수막용 광목을 타먹기 위해 입후보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보조경찰관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하지」장군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민간자치 기구로 「향보단」을 조직하겠다는 얘기였다.
조부장은 이조시대의 지방관직제 가운데 향청제를 모방. 국립경찰의 보조치안단체로 향보단을 만들어 선거에 대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조시대의 군·현에는 각기 고문 또는 자문기관으로 향청 또는 향소라는 것이 있어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맡아 왔었다.
조부장은 「하지」장군에게 『향보단은 경청 같은 제도로 자기 고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 군수나 현감을 도와 그 고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제도였다』 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하지」장군은 『선거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 는 이유로 이것도 거절하고 나섰다.
조병옥 경무부장이 『자발적인 자치단체도 만들 수 없단 말이냐』고 따졌지만 「하지」 장군은 『어느 특정 정당에서 선거에 이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느냐』 고 반문했다. 답답해진 조병옥 부장은 이승만 박사를 찾아가 향보단 조직계획을 설명했다. 조부장의 설명을 듣고 난 이 박사는『퍽 좋은 생각이야. 그런 조직이라도 있어야 선거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 거야. 「하지」는 뭐라구 하던가?』하고 물었다.「하지」장군이 반대하더라고 말하자 이박사는 『어떻게든 「하기L룰 설득시켜 향보단을 조직해야 공산당의 파괴활동을 예방하고 선거를 치를 수 있지 않겠느냐』 고 했다.
이박사의 말에 힘을 얻은 조병옥 경무부장은 「하지」장군을 다시 설득한 끝에 절대로 민폐를 끼치거나 선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향보단 설치를 승낙 받았다.
이렇게 해서 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향보만이 조직됐다. 향보단은 각 경찰서 단위로 경찰서장 책임아래 관할내의 우익 청년들로 구성됐다.
이들 청년들은 지·파출소 등에 2∼3명씩 배치돼 경찰의 방범 활동을 돕고 선거 기간에는 경찰서에 대기하다 사태가 발생하면 경찰보다 먼저 출동, 수습했다.
향보단은 5·10선거가 끝나자 곧 해체됐다. 5·10선거 때만해도 「유엔」감시단이 선거분위기를 감시하러 와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강력하게 나서거나 선거운동원의 위법행위조차 마음대로 단속할 수 없었다.
그 뒤 자유 당 때처럼 경찰의 영향력이 그렇게 대단치 못했던 셈이다.<계속>
5·10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내한한「유엔」한국위원회 위원단이행이 환영대회 단상에서 꽃다발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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