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제41화 국립경찰 창설(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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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병동맹사건과 경찰>
학병동맹사건은 사태수습에 나선 경찰이 편파적인 처사를 했다는 이유로 좌익은 물론 미군정당국으로부터 신랄한 추궁을 받아 오랫동안 시끄러웠던 사건이다.
이 소란은 사건에 가담했던 반탁학생은 절대 구속할 수 없다는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당국이 조병옥 경무부장과 종로경찰서를 지휘, 반탁학생간부들을 체포함으로써 무마됐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선 반탁학생들을 구속해야하는 초창기 경찰의 고충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8·15해방의 감격이 아직도 새롭던 45년10월24일. 서울시내 각 일간신문은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 『한국에 5년간 신탁통치 예정』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난데없이 전해온 신탁통치소식은 해방의 기쁨과 감격에 부풀었던 온 겨레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을 질러놓았다.
해가 바뀌자 서울시내 19개 남녀전문학교 및 대학 대표들은 반탁 전국학생총연맹을 결성. 위원장에 보전의 이철승(현 국회부의장)을 선출하고 전국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은 이 같은 반탁 학생들의 운동을 노골적으로 후원은 못했지만 거의 방관하다시피 했다.
반탁 학생총연맹은 46년1월18일 하오 2시부터 서울시내 정동교회에서 반탁학생 성토대회를 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에는 죽음으로 항의할 것을 결의했다.
성토대회는 하오 5시쯤 끝났으나 남녀학생 5백여명은, 미국영사관과 소련영사관으로 몰려가 결의문을 전달하고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거쳐 을지로에 자리잡고 있는 좌익대변지 인민보사로 몰려가 신문사를 파괴했다.
학생들은 다시 인사동으로 몰려가 인민당 본부와 시설을 때려부수고 다시 안국동 네거리에 있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및 부녀총동맹사무소를 짓밟은 다음 서대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대문에 자리잡고 있는 죽첨장으로 가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학생들의 반탁의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학생들의 행렬이 신문로1가쪽에 이르자 총기를 든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향해 마구 총을 난사하고 달아났다.
갑작스런 총격으로 남녀학생 40여명이 부상해 쓰러지고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한 길거리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됐다.
피습 당한 인민당의 요청으로 학병동맹군사부장 박진동 등 10명이 무기를 들고 뛰어나와 시위행렬을 하는 학생들에게 보복을 했던 것이다.
학병동맹은 일제 때 강제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던 학생들 가운데 좌경해버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좌익단체였다.
사고소식을 전해들은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은 무장경관 3백명의 출동을 명하고 총기 불법소지단체인 학병동맹을 전원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장 부장의 출동명령을 받은 일부 경찰간부들은 학병동맹의 위력에 겁을 먹은 나머지 『야간에 손댈 필요가 있습니까』 『미군 현병대에 부탁하지요』하고 슬슬 꽁무니를 빼며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 같은 경찰간부들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다못한 장 부장은 『밤이 돼서 살인강도들에게 손을 못대? 뭐, 미군에게 원조를 요청해? 그대들은 허수아비 경찰이란 말인가』고 호통치며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다음날 새벽 2시 무장기동 경찰들은 장택상 경찰부장의 진두지휘 아래 삼청동 학병동맹본부를 포위했다. 당시 기동경찰은 일제 때의 삼륜「오토바이」를 탄 보잘 것 없는 장비였지만 폭동 현장에 출동하면 위엄이 대단했다.
학병동맹본부에는 이들이 끌려갔던 날인 1월20일을 학병기념일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전회원이 사무실에 모여있었다. 경찰의 포위를 눈치챈 동맹원들은 예측했던 대로 총격을 가해왔다.
장 부장은 「스피커」를 들고 『학병동맹은 들으라. 학병동맹은 들으라』하고 외쳤다. 잠시 총소리가 멎었다. 『총을 버리고 나오면 관대히 용서해 주겠다. 어서 손들고 나오라』장 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새벽공기를 울렸다.
총격이 시작됐다. 경찰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도 물을 뿜었다.
쌍방의 총격전은 약3시간이나 계속된 끝에 날이 밝은 뒤에야 경찰은 1백19명의 동맹원을 체포하고 권총 등 다수의 무기를 압수했다.
위원장인 박진동과 간부인 김병근은 사살됐고 경찰측에도 2명의 부상자가 났다.
이 사건으로 장택상 경찰부장은 다음날 「하지」장군의 소환명령을 받았다.
사령관실로 들어서는 장 부장을 본 「하지」는 다짜고짜 『「치프」장, 당신 미쳤소. 학생들 싸움에 경찰을 개입시켜 두 사람이나 희생자를 낸단 말이오』하고 소리쳤다. 또 좌익에서는 싸움을 건 반탁학생들을 두고 피해자인 학명동맹을 검거한 것은 경찰의 편파적인 처사라고 「하지」에게 대들었다. 특히 몽양 여운형은 이 같은 편파적인 처사를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을러댔다.
「하지」는 마지못해 난동을 부린 반탁학생들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장택상 부장은 반탁학생은 구속할 수 없다고 버티었지만 미군정 당국은 종로경찰서를 직접 지휘 1월20일 상오 9시 「세브란스」의대를 포위하고 회의 중이던 반탁학생간부 41명을 체포했다. <계속><제자 김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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