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제자 강신명>|<제40화>기독교백년(33)|강신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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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시대의 창조>
진리는 영원불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꾸 변하고 있다. 일제시대 어떤 소설가가 문예잡지에 실은 단편소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옆집 처녀가 키가 한치나 더 컸다』는 것이 그 소설의 첫줄이었다.
옆집 처녀의 키를 언제 재어 보았나? 또 어떻게 정확하게 한치가 더 큰 것을 알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국 어제 여학교를 졸업하고 오늘 아침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나가니 한치나 더 컸다는 것이었다. 변하는 세상에서 제복의 제약을 받고 있던 젊은이가 졸업과 함께 변하는 세상에 보조를 맞춰 가려는 심리의 표현일 것이다.
개화기에 한문서당에 다니던 초립 동들은 신문화의 교육을 받겠다고 신식학교를 찾았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선친이 세운 학교로 찾아와 입학하고 상투를 깎는 것을 보았다. 마지못해 상투를 깎겠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가도 막상 상투가 앞에 뚝 떨어질 때 나이가 좀 든 사람은 눈물을 글썽거렸고 조금 어린 새서방들은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오늘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90년. 한 세기를 바라보는 이 마당에 있어서 초창기에 복음을 처음 받아들이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이끌던 물산 장려 운동은 그 시대에 있어서 생활혁명이었다.
인습에 젖어 있던 세대의 반발은 컸으나 교회가 여기에 호응하고 뒷받침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올렸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교회도 새 역사의 창조를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토착화 운운하면서 단군신화를 구약성서의 창조신화에 결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주장, 교회의 존재의의와 존재가치는 현실사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다』할 때 빛 되신 신은 모두 어두움의 세력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니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수밖에 없고, 부패방지에 힘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공의로우신 동시에 사람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을 믿는「그리스도」인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자기권리가 침해 당하지 않기 위해 힘쓰는 동시에 남의 인권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그런 것은 세속적인 문제요, 기독교는 영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영혼구원에 관한 것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자신들을 성서이요 복음 적이라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을사보호조약과 경술 년 한-일 합병 속에서 선교사들이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고 현실도피와 종말적인 희망에만 역점을 둔 선구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계시록 중심의 교회가 되었고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예수」재림만을 갈망했고 해방 후 6·25동란은 더욱더 그런 것을 부채질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청송출신의 박동기 라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이분은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면 전쟁은 끝나고「예수」가 재림하셔서 신나고도 경주에「시온」제국의 수도 새 「예루살렘」이 건설된다고 했다.
전도 관의 출발이「에덴」복구 기도원이라는 것과 모교가 복구원리를 들고 자신을 재림 주로 호칭한 것도 현실도피와 사후낙원을 강조한 잘못된 가르침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새 역사는 현실을 떠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신「예수·그리스도」가 육신을 쓰고 인간세상을 찾아와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이룩하신 것과 같이, 오늘의 교회도 타 세가 아니라 오늘 현세서부터 하나 둘 성취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 하나 하나가 개인이나 개 교회나 개체 교포문제가 아니고 전체의 문제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한 교파나 어느 특정한 교리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로써『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그대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나라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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