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역사와 긍지의 모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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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에는 외국의 문화재나 미술품이 희귀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유사이래 한반도 위에서는 무수한 전쟁이 되풀이 됐지만 해외를 정벌한 예는 없다. 그렇다고 재력으로써 그것을 사들일 형편도 못 됐다.
중세「로마」제국은「이집트」와「에게」해역을 휩쓸며 유적유물을 송두리째 노략질 해 다가 싸놨다. 그게 곧「르네상스」의 바탕이 됐고, 오늘날엔 관광물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파리」「런던」「베를린」에 쌓여있는「이집트」「아시리아」「그리스」「로마」와 그 엄청난 유물들도 말하자면 그런 성격의 침탈 소득이다. 『모든 문화재는 본래의 자리에 보존되어야 하며…』라는「유네스코」의 국제적인 문화재 운동이 베풀어지기 훨씬 이전에 자행된 일들이다.
북구의 몇 나라들은 역사가 화려하지 못한「바이킹」의 후예들이지만 근세의 2백여 년 동안 전쟁 없이 조용히 살며 부를 축적, 남구와 기타 지역으로부터 꽤 많은 물건을 모았다고 한다.
이에 비에 미국은 아주 뒤늦게 눈뜬 셈이다. 그들은 지금 동분서주하며 서구의 문화와 문화재를 본뜨려하지만 재력으로도 일조일석에 이룩되지 않는 게 역사다. 더구나 서구의 공공기관에 수장된 역사 유물이야말로 아무리 탐내도 옮겨갈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몇 박물관·미술관을 돌아본 절실한 감명은 역사를 창조하고 국민의 긍지를 심으려는 그들 나름의 노력이다.「워싱턴」국립 역사 기술 박물관의 경우,「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처럼 량으로써 압도할 수 없는 반면에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으로 정리하고 활용한 효과는 훌륭하고 대견한 것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너덜너덜 찢긴 성조기 한 폭. 이 낡은 기폭에는 1814년 영국 함대를 격퇴시킨 역사가 구구절절이 담겨있다.
또「조지·워싱턴」의 의치와 역대 대통령 부인의 의상, 「프랭클린」의 인쇄기와「에디슨」의 전등, 남북전쟁 때 어느 용사의 피 묻은 재 복이며 가까이는「헬렌·켈러」의 유물 그들 국민의 얘깃거리가 될만한 것은 모두 모아놓은 느낌이다.
미국의 역사는 너무 짧다. 그래서 그들은 빙하시대로 소급한다. 미국 땅에서 발굴되는 각종 화석과 모형을 비롯하여「인디언」의 역사와 생활을 자신의 일부로 삼았다. 더구나 해저를 탐험하여 건져낸 목선과 대포·동전·그릇의 파편 등은 신대륙을 개척한 조상들의 피 땀 어린 역사와 긍지.
그밖에 농업기구·차량·선박·철도·전기·각종 공구와 공작·기계·천문기계·보건기구와 원자력에 이르는 발전상을 관람하며 스스로 체험하게 했다.
군대의 역사와 무기. 혹은 옛날의 각 기관과 주민의 생활 양상 등을 복원하여 온 국민의 참여의식을 북돋워주고 또 공예와 의장을 통한 창의적 노력도 일부 제시했다.
뛰어난 미술품만이 박물관에 간수되는 건 아니라는 대표적 본보기다. 하찮은 물건도 의도에 따라서는 유익한 관람 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교훈적인 사례다. 그것은 바로 박물관이 국민의 역사와 긍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는 모체 구실을 하고 있다는 보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은 북구에서도 다소 엿보였다. 「코펜하겐」근교의「오픈·하우스」나「스톡홀름」의「스칸센」같은 야외민속촌이 이곳에서 유독 발전된 까닭은 대견치 못한 그들의 문화사를 다른 방법으로 대치해 자부해 보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사실 그들 민속박물관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허름한 가구식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우리 나라의 구석구석을 뒤져본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인구 80만이라는「스톡홀름」에 각종 박물관, 미술관이 무려 40여 개소, 그 중엔「바이킹」건조한 한 척의 목선박물관도 포함돼 있었다. 서독「프랑크푸르트」의 역사 박물관도 한 도시의 내력을 여러 모로 해명해주는 시설과 전시방법을 취했다. 책이나 긴 설명을 읽지 않아도 2천여 년 전부터 2차 대전 때 폭삭 파괴되기까지 도시의 생성과 발전 및 문화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이런 박물관을 세워놨는가 하는 이유를「워싱턴」에 당도한 뒤 비로소 깨달았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옛 문화의 자취는 먼데까지 갈 것 없이 이웃 중국과 비교하더라도 량으로나 질로나 따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문화가 이어져왔고 또 남 못지 않게 훌륭한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빛내는데 소홀해 왔고 인색해 왔다. 정말 무엇을 빛내어야 하는가를 미처 생각지 않았다. 도대체 한 나라를 통틀어 박물관은 몇이나 되며 그 현황은 어떠한가? <계속><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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