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부르크부터 … 11번째 겨울올림픽 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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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희 회장이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 참가 증명서를 들고 있다. 그는 76년 인스부르크 대회부터 2014년 소치 대회까지 감독과 단장, 국제기구 감독관 등으로 열한 번의 겨울올림픽을 지켜봤다. [강정현 기자]

겨울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첫 출전한 1948년 생모리츠 대회 후 44년간 메달이 없었다. 92년 알베르빌에서 어렵게 첫 메달을 따내더니, 그 이후 2010년까지 총 45개(금 23·은 14·동 8)의 메달을 쏟아냈다. 2010년 밴쿠버 대회 땐 세계 5위(금6·은6·동2)에 올랐다.

 장명희(82) 아시아빙상연맹(ASU) 회장은 기적 같은 한국 겨울스포츠의 ‘압축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다. 76년 인스부르크 대회부터 2010년 밴쿠버 대회까지 감독·단장, 국제기구 감독관 등으로 현장을 누볐다. 알베르빌에서 김윤만의 은메달부터 밴쿠버 김연아의 피겨 금메달까지…. 어느덧 팔순을 넘어섰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40대 중반부터 지켜본 장면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올림픽은 국제 정치가 첨예하게 대립한 무대이기도 했다. 냉전시대였던 80년 레이크플래시드 대회 때는 미국과 소련의 기싸움이 대단했다. 장 회장은 “당시 미국 뉴욕주에 새로 건설한 형무소를 선수촌으로 썼다. 소련 선수단은 형무소에 갈 수는 없다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고 회상했다. “대회 전날까지 눈이 안 내려 군 병력이 동원돼 덤프 트럭으로 눈을 옮기더라. 그날 밤 폭설이 내려 그 눈을 다시 치우느라 법석을 피웠다”고 껄껄 웃었다.

 가장 큰 보람은 역시 한국 빙상의 발전이다. 장 회장은 “김윤만이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한국의 겨울올림픽 첫 메달을 딸 때 현장에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 누구도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들 TV를 보다가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 왔다”고 했다. 그는 “사진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국내 취재진에게 일본 NHK를 통해 받은 사진을 직접 전해줬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의 환경도 열악했다.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영하가 세계 최강이던 에릭 하이든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76년 세계 주니어선수권 때는 이동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그는 “이탈리아로 기차를 타고 들어가 쏘렌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3시간30분을 더 가서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1시30분이었다. 그날 오전 운동을 쉬고, 오후 2시에 연습을 해 그 다음 날 경기를 치렀다. 지금 선수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빙상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투자를 하면서 조금씩 발전했다. 76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선 피겨의 윤효진이 미국 코치 존 닉스의 지도를 받아 17위에 올랐다. 스피드스케이팅도 80년부터 노르웨이 코치를 전담시켜 훈련했다. 이런 노력이 밑거름이 돼 김연아와 이상화가 나온 것이다. 장 회장은 “일본에서 쇼트트랙을 본 후 동양 선수와 잘 맞을 것 같아 85년 서울에서 세미나를 하고 쇼트트랙을 본격 시작했다”며 “파벌 싸움으로 안현수라는 다이아몬드를 도둑맞았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스켈레톤·봅슬레이·컬링에도 우리 선수들이 출전하는 건 예전엔 생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이냐”며 “겨울올림픽을 개최하고, 다양한 종목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고 했다. 지난 5일 장 회장은 소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의 11번째 겨울올림픽이다.

글=배중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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