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져간 것」과 「못 가져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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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멀고도 가까운 나라-. 역사적으로 가장 교류가 밀접했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과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깝지 않은 두 나라다.
10여 세기를 거슬러 문물사상이 전도했던 평화적인 역사만을 본다면 그리도 가까울 수 없는 두 나라다.
오늘날 일본의 정신적 근간을 이룬 유불신의 정신이나 여러 가지 생활문화는 이 평화적 교류의 유산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교류를 한민족이 거금을 통해 「시혜」로 들먹인 적은 한번도 없다.
더우기 일본은 평화적으로만 가져간 것인가. 3백80년 전의 임진난 때만 하더라도 숱한 살상을 일삼고는 또 사람을 잡아가고 물자를 약탈해갔다.
불과 백년사이의 양국관계는 우리에게 더욱 통분스럽다. 한발 앞서 문호를 개방해 서구화한 일본은, 그때껏 쇄국수구한 한국을 줄곧 유린하고 빼앗아갔다.
36년간의 압정아래서 한국은 문화를 짓밟히고 언어를 빼앗겼다. 광공업자원은 모두 실려갔고 농민은 수탈 당했다. 민족의 사상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은 교육도 방해했다. 관학을 세워 기껏 심부름꾼이나 길러내려 했고 소학교에서부터 일본어와 황국사라는 것을 강요했다. 끝내는 나라를 송두리째 뽑았다.
「가져가기만 한 일본」은 2차 대전 후에도 마찬가지다. 6·25 동난을 통해 일본은 전쟁경기를 누렸고 국교 정상화 후에도 무역·차관·투자라는 명분 아래 많은 이윤·이득을 가져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가져가기만 한 반복 속에서 가져가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민족」이며 「역사」다.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부터 일본의 바람은 정치에서 시민생활에까지 밀어 닥쳤다. 일본의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나란히 꽂히는 수도 많았다. 그런데 이 태극기와 일본국기가 나란히 꽂힌 광경을 한국인의 어느 가슴도 조화롭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은 잠시도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때부터 오늘날까지 정치세력의 기간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일본을 이해하는 층이다. 지배층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항일세력은 기간세력에 눌려 차자 몰락해 갔다. 그래서 대일 강경책을 수정한 민주당 정권은 「지일내각」이라 불리기도 했고 그후 『반공을 위한 일본과의 선린』 또는 『급속한 근대화를 위한 경제협력』이 강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반일」이 지사적 우국으로 평가를 받고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본이 「역사」는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져가기만 한 일본-. 강했기 때문에 가져갈 수 있었고 분명히 지금도 강하다. 그러나 「민족」과 「역사」는 가져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강하다는 잠재의식만이 일본 속에 살고있다. 그 단적인 노출이 바로 「구보전 발언」이었다.
일본의 한국통치에 관해서는 반드시 나쁜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한국의 근대화에 일본도 어느 정도 공헌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구보다」(구보전)의 말이었다. 51년에 시작된 한·일 교섭은 이 구보전 발언으로 53년에 결렬되었었다.
5·16 혁명 후 재개된 양국의 교섭이 많은 파란을 겪은 끝에 성공은 했으나 구보전 망언 10년이 지난 후 일본의 대한관념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통치기간 중에는 도로도 닦았고…』운운, 『김을 만드는 법을 한국에 가르쳐 주는 등 시혜를 했고…』 운운하는 말이 최근에도 있었다. 일본의 지도층에서 일반국민에 이르기까지의 이 같은 대한관념의 기조는 「가져갈 수 있었던 강자」라는 잠재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가져갈 수 없었던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 천박이다.
일본은 백여년 전부터 한국보다 선진 했고 지금의 경제력에도 큰 차이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의 지위가 미국의 점령정책아래서 구축되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작년의 석유 파동을 계기로 그 근저가 흔들린 깊이라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그런가하면 전후세대는 지나치게 서구화한 나머지 일본적인 전통을 잃어버린 채 무국적 적으로 성장하고 있음도 알려진 일이다.
이 탈사적 일본에는 「가져갈 수 있었던」 지난날의 환상만이 깔려있기 때문에 「반일」의 불길을 동남아 곳곳에서 마주치는 것이다.
일본의 어느 저명한 작가는 얼마 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길에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알았다고 술회했다. 이등박문이 「하르빈」에서 암살된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안중근이라는 이름은 서울에서 처음 보았다는 이 작가는 안 의사 자필의 글씨와 문구가 자살한 일본작가 삼도유기부의 것과 비슷한데 놀랐다고 했다.
한국의 중학생·국민학교 학생이 모두 안중근 의사를 알고, 민비 시행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기억하고 있음을 이 작가가 알고 갔는지는 의문이다.
한·일 양국관계의 불행한 과거와 정형되지 않은 현재. 문명의 혜택으로 두 나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갭」은 줄었다지만 「콤프리헨션·갭」(이해의 거리)은 얼마나 줄었을지 생각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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