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딴 데 알아봐라” … 자료 못 구해 창업 포기할 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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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03면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정부 3.0’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정부 3.0과 공공데이터포털, 정보공개시스템 홈페이지의 초기화면.

“공공정보를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공유하며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 소통하고 협력함으로써 국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동시에 일자리 창출과 창조경제를 지원하는 새로운 정부운영 패러다임입니다.”

중앙SUNDAY가 이용해 본 ‘정부 3.0’

‘정부 3.0’ 홈페이지(www.gov30.go.kr)에 나오는 설명이다. 거창하고 긴 문장 안에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정부 3.0의 목표가 모두 담겨 있다. 국민이 참여하는 ‘열린정부’를 추진하면서 창업과 일자리 창출 같은 경제적 효과도 얻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정부 3.0 추진에 대해 강한 의지를 밝혀왔다. 하지만 정부의 의지만 믿고 사업을 구상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고등학생 한효주(18·여·가명)양도 마찬가지다. 한양은 성폭력범죄 경보 앱 개발을 구상했다. 성폭력범죄가 빈발하는 지역에 가면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경보를 울려준다는 아이디어였다. 지난달 한양은 성폭력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시간대와 지역정보 데이터를 경찰청에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청은 “홈페이지에 이미 공개된 자료”라며 제공을 거부했다. 한양은 자신의 신분과 자료요청 이유를 밝힌 뒤 “수정·변환이 가능한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끝내 자료를 받지 못했다. 한양은 “학생 신분이어서 따로 데이터를 가공할 여력이 안 된다”며 “정부 3.0에 기대를 걸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정부 3.0은 2000년대 중반 미국·서유럽 등에서 활발히 진행됐던 정부 2.0의 발전된 형태다. 작가이자 미국 정부 컨설턴트였던 윌리엄 에거스의 2005년 저서 『정부 2.0(Government 2.0)』에서 유래했다.

에거스는 웹 2.0(web 2.0)의 개념을 정부로 확장시켰다. 그는 데이터(정보)의 독점 없이 누구나 손쉽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사용자 중심의 인터넷 환경, 즉 웹 2.0의 정신을 정부에 대입했다. 공공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국민의 참여 기회를 보장하고, 투명하고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때 전자정부를 구축하면서 정부 2.0의 토대가 마련됐다. 뛰어난 인터넷 인프라에 전자정부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2000년대 후반 한국판 정부 2.0이 구체화됐다.

정부 3.0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앞서나간 개념이다. 국민이 원하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 과정에 대해’ ‘국민 중심으로’ 제공한다는 게 ‘정부 3.0’의 목표다. 공개되는 정보는 생산 즉시 원문까지 공개하고 제공 창구 역시 공공데이터포털(www.data.go.kr)로 일원화했다.

벤처회사 직원 이종훈씨는 “공공데이터법 시행 이후에도 변환 가능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용철 기자

정부 3.0 이용자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것은 공공데이터법 시행 이후에도 수정·변환 가능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기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공데이터법은 ‘공공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기계 판독이 가능한 형태로 정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법이 수정·변환 가능한 데이터 제공을 강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공공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면 수정·변환 가능한 데이터 제공이 필수적이란 점에서 정부도 이를 독려해 왔다.

본지는 지난 1주일 동안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 여성가족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를 대상으로 공공데이터 제공을 요청해봤다. 정부부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이미 공개돼 있고 개인정보를 침해하거나 저작권이 있는 정보가 아닌 것을 골라 수정·변환 가능한 형태로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먼저 문체부에 전국 박물관 위치와 전시내용이 담긴 엑셀 파일을 요청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자의적으로 수정할 위험이 있는 엑셀파일은 줄 수 없다”고 했다. 공공데이터법 취지를 들어 ‘수정·변환 가능한 파일’을 재차 요구했지만 “공공데이터법에 대해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음은 국토부. 전국 고속도로 및 지방국도 현황이 담긴 텍스트 파일을 요청했다. 국토부 담당자는 “통계청에 가서 찾아보라”고 답했다. ‘2013년 기준 고속도로 및 국도 수와 구간이 담긴 파일은 통계청에 올라와 있지 않다. 공공데이터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담당자는 “왜 통계청에 있는 자료를 우리에게 따로 요청하느냐”고 되물었다. 비공개 사유가 있는 것을 제외하곤 생산된 모든 데이터를 공공데이터포털을 통해 개방하라는 정부 3.0의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여성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경력단절여성 지원센터 현황과 전화번호가 담긴 엑셀 파일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는 답변이 나왔다. 정보공개 청구는 ‘정부 2.0’ 시기에 이미 시행되고 있던 제도다. 정부 3.0을 부처 담당자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수정·변환 가능한 데이터를 제공한 곳은 해양부가 유일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데이터를 볼 수 있는 국립수산과학원 홈페이지 주소와 담당자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공공데이터포털로 안내하지 않고 산하기관 홈페이지를 안내한 점은 역시 정부 3.0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부 3.0은 박근혜 정부가 처음 들고나온 개념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우리나라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66차 유엔총회에서 ‘열린정부 파트너십(Open Government Partnership·OGP)’에 가입했다. OGP는 각국 정부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다국적 협력체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63개국이 가입돼 있는 OGP는 가입국이 제출한 ‘열린정부’ 이행계획(National Action Plan)을 점검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부 3.0 추진 과정에서 OGP협약은 까맣게 잊혔다. 정부가 바뀐 뒤 인수인계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 취지의 정책이지만 연속성이 전혀 유지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공데이터 전문가인 서울북부지법 윤종수 부장판사는 “정부가 당장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활용 건수를 공개하고 양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윤 부장판사는 “진정한 공공데이터는 ‘해킹하고 싶은 자료’여야 한다”며 “데이터 접근의 장벽을 낮추고 사용자들이 그 데이터를 맘껏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공공데이터의 양과 질을 모두 높이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운대 과학기술법학과 권헌영 교수는 “정부의 의지나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한국은 일찍부터 전자정부를 구축해 좋은 데이터를 많이 확보하고 있지만 일선에서 자료를 제공하는 공무원들이 아직 옛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지침이 마련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 3.0이 본격 가동된 지 불과 8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시간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공데이터 개방운동을 하는 사회단체 ‘코드나무’의 임영제 활동가는 “정부 3.0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단기간 내에 이뤄낼 수 없다”며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보여주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종수 부장판사도 “공공데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끊임없는 피드백”이라고 말했다. 윤 부장판사는 “직접 공공데이터를 사용해보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며 “정부 3.0은 정부와 시민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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