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된 정치판에서 지식인 할 일은 미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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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12면

학문의 중립성과 참여’를 주제로 8일 강연 중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조용철 기자

최장집 명예교수는 “한 사람의 학자, 지식인이 정치적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세를 지키면서 학문적 탐구에 전념하는 것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를 특징으로 한 한국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학자에게 명성과 영향력, 그리고 다른 부수적 이익을 가져다줄지 몰라도 그 결과는 부정적이거나 매우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학자와 정치 참여

학자들의 정치 참여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는 “자성적(自省的) 사고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자기비판적인 측면도 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지난해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을 맡는 등 간간이 정치판에 등장해 왔다. 강연 뒤의 질의응답에서 그는 과거의 정치 참여에 대한 질문에 “차라리 그 시간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각기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반성적으로 되돌아볼 때 거기에 들어가서 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 교수 강연의 요지.

민주화 뒤 학자의 정치 참여 폭발적 증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마키아벨리·홉스 등은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반면 루소·니체·롤즈 등은 정치에 거리를 두고 학문적 영역의 활동에 전념했다. 학자들이 파당적 정치에 참여했느냐 안 했으냐는 그 자체만으로 긍정적 또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에 학자들의 정치 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많은 이가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정당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다. 사회운동이나 공론장에서의 활동도 늘었다. 지식인들이 본래의 자기 역할(학문 탐구)을 하는 것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정도다.

학자들은 주로 행정관료들이 이미 결정해놓은 정책들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을 뿐 정책 사안들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거나 대안 심의에 기여할 기회를 갖기 힘들었다. 중요한 변화와 개혁, 또는 나쁜 개혁을 저지하는 것에 공헌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작았다.

학자들, 양극화 완화 역할 못 해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를 불러왔다. 지식인들은 이를 증폭시키거나, 완화하는 데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는 대학생들과 교육받은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이후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도덕적, 이상주의적 목표를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정서적 급진주의’를 유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진영 간의 대립이 고착화되면서 학자들은 대립 중인 진영의 어느 한편에 서게 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 중간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거나 도피적인 것에 불과했다.

한국 정치에는 광범위한 심의와 소통을 거치지 않고 ‘폐쇄회로적’으로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낙후성이 잔존한다. 정치 체제는 민주화되었으나 정책 결정 방식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사업, 박근혜 정부의 KTX 민영화 문제가 대표적이다. 대학 교수들은 나쁜 정책 결정에 파당적 필요성에 따라 동원되기도 했다.

소명의식과 책임윤리 갖춰야
막스 베버는 대중강연 ‘소명/직업으로서의 학문’(1917)에서 학자들이 정치적 선동가가 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객관적 탐구에 천착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윤리라는 점을 역설했다. 진실을 발견하려는 과학적·학문적 열정과 자신의 이상을 옹호하려는 실천적 충동의 구분, 즉 학문의 중립성을 강조했다. 학자는 진실을 왜곡하거나 깊이 탐구하지 않는, 소명의식과 책임윤리를 결여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의 추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실에 참여하는 ‘공적 지식인’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대학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해도 얼마든지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 오히려 더 훌륭하게 공헌할 수 있다. 소명의식을 가진 학자들에게 세 가지 덕목을 권한다. 경험적 사실 추구에 기초하여 진실을 추구하려는 열정, 도덕과 닿아 있는 비판적 이성, 절제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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