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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노자의 『도덕경』 번역하는 미당 서정주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8월 중순의 막바지 무더위가 노자의 『도덕경』위에서 조는 듯 머무르다가 문득 서늘한 바람이 되어 원고지위를 시원하게 치닫는다. 노 시인 미당 서정주씨의 초가을 간행을 목표로 노자의 대표적 사상서 『도덕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이 여름을 잊고 있다.
『노자사상을 총칭하여 무위자연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공자사상을 유에 비중을 둔 인륜사상이라고 한다면 노자사상은 그러한 상대적 가치이상의 절대적 가치, 즉 무에 비중을 둔 자연주의사상이라고 할수 있지요.』
『도덕경』이 이미 번역소개 됐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번역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이제까지의 고전사상서가 너무 어렵게만 번역되는 경향을 보여왔기 때문에 국민학교만 나와도 이해할수 있도록 쉽게 번역하여 많은 사람이 읽게 하자는 것이라고 미당은 말한다. 미당은 또 이제까지 시·시론 「에세이」등 창작만 해왔으나 일생동안 스스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성현들의 사상서를 번역할 계획을 세워 『도덕경』번역은 그 계획의 첫 실현이며 곧 석가의 『금강경』, 공자의 『시경』번역도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자연에는 선악과 시비가 따로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꽤 깊은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황제는 백성들이 황제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황제이며 그 다음이 백성들에게 선정하는 황제, 무섭게하는 그리고 가장 나쁜 멸시 당하는 황제>라는 말도 그러한 노자사상과 통하는 것이지요.』
젊었을 때 불교전문학교를 다녔으나 그 무렵에는 불경 따위에 깊이 심취하지 못하다가 해방후 불경과 노자를 새로 읽으면서 그 속에 담겨진 깊은 뜻에 탐닉하게 됐다는 미당은 불경과 노자가 그후 자신의 작품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한다.
『글이 쉬워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상서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더욱 절실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번 「도덕경」번역에서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시적 표현을 앞세운 번역입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읽지 않아도 그 속의 깊은 뜻을 쉽사리 이해할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미당은 6·25후 전주에서 치사량 넘는 약을 먹고 죽음의 고빗 길에서 오랫동안 방황했었다. 그때 느낀 삶에의 체념은 종교적 영생사상과 일치하는 것임을 깨달았으며 그로써 전생·현세·내세 즉 3세의 인과관계 속에서 모든 사물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미당은 털어놓는다. 이러한 동양사상속에서 미당은 새로운 언어미학적인 것을 발견했으며 그러한 발견은 그후 미당의 작품세계에 맑고 싱싱한 감각의 기틀을 형성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사상이 새로워질 때 그 사상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불교와 노자의 사상 속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해 왔지요.』
미당은 노자의 「도덕경」번역으로 시작된 고전번역 작업으로서 앞으로 그의 작품세계가 좀더 새로운 변모를 보일 것이라고 암시한다. 밖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쪽소반 앞에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고 앉은 미당의 주변에는 서늘한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정규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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