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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귀신으로 변질된 훙바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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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규
최형규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중국의 ‘훙바오(紅包)’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거다. 말 그대로 ‘붉은 봉투’인데 한국의 세뱃돈에 해당한다. 춘절(春節·음력설)에 자녀들이나 후배들에게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전하는 적은 액수의 금전이다. 한데 요즘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선 이 훙바오가 훙바오(紅爆·붉은 폭탄)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요즘 전통문화 속 훙바오, 즉 야쑤이첸(壓歲錢)은 사라진 지 오래고 붉은 돈 귀신만 판을 친다는 거다.

한나라 때 생겨난 야쑤이첸은 설날 자녀들이 귀신의 작태에 놀아나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바람을 담아 전한 조그만 액수의 금전이다. 쑤이(歲)는 귀신의 농간을 의미하는 쑤이(<795F>)와 음이 같다. 이 야쑤이첸이 중화민국 시대 붉은 봉투에 돈을 넣어 전하면서 훙바오가 됐다. 이후 어른들은 춘절에 아이들에게 8위안이나 18위안(약 3190원)을 건네며 중국의 전통민속으로 자리 잡았다. 복을 받으라는 의미의 파차이(發財)는 8, 복 받기를 원한다는 야오파차이(要發財)는 18과 각각 발음이 같다.

그러나 이 문화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가 폭발적 성장을 하면서 부자들의 돈 잔치로 변하더니 올해부터는 사회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달 6일 서비스가 시작된 웨이신(微信·중국판 카카오톡) 훙바오다. 휴대전화에서 앱을 다운받고 자녀나 친지들에게 원하는 액수를 송금하거나 선물을 하는 것인데 춘절 연휴기간 하루 평균 500만 명이 이용해 대박이었다.

편하게 훙바오를 전달해 가족이나 친지의 행복을 기원토록 하겠다는 취지까지는 좋았다. 한데 눈앞에서 돈이 날아 다니다 보니 이 서비스를 역이용하는 송금 사기가 판을 쳤고 훙바오 액수를 놓고 가족 간, 친구 간 원수가 되는 일도 속출했다.

샤먼(廈門)에서는 시아버지의 훙바오 액수가 다른 며느리보다 적은 것을 안 막내 며느리가 농약을 먹었고 상하이(上海)에서는 친구 송금 액수가 자신이 보낸 것보다 적은 것을 안 10대가 인터넷을 통해 절교를 선언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쓰촨(四川)성에서는 73세의 졸부 할아버지가 훙바오를 학교성적에 따라 1만~5만 위안(약 886만원)씩 나눠주는 바람에 손주들끼리 코피가 나도록 싸우는 일까지 발생했다.

중국 정부의 반부패 의지 때문에 공무원들에게 직접 뇌물을 줄 수 없는 분위기를 반영하듯 올 춘절은 유난히 공무원 자녀들의 훙바오가 두툼했던 것도 예전과 달랐다. 산시(山西)성에서는 한 업자가 공무원 집을 방문해 그 아들에게 3000위안이 든 훙바오를 전했는데 이 사실을 안 공무원이 그 돈을 되돌려줬다. 그때 이 공무원 아들 왈, “아빠, 그 돈 원래 제 돈 아닌가요” 했다. 물론 아빠는 “헐~”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중국 걱정할 일도 아니다. 한국의 자녀들도 세뱃돈을 ‘한탕’ 정도로 생각한 지 오래다. 모두 부모들 책임이다.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