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기7전…닉슨의 영욕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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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8년간의 정치생애 동안 승리와 패배사이를 칠전팔기로 곡예사처럼 헤엄쳐온 「닉슨」, 사자와 여우의 분장술로 영욕을 번갈아 누려온 그가 마침내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불쌍하고 가련한 거인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생애 중에 수없이 나타나는 성공과 패배의 얼룩을 관찰해 보건대 그는 분명 이념이나 철학을 가진 「신념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집념으로 응결된 비범한 정치 기술자였다.
이같은 그의 정치기술이 그를 최고 권좌에 앉히기도 했고 또 「워터게이트·스캔들」의 진 수렁에 빠뜨려 스스로 정치 생명을 끊게도 했다. 「닉슨」은 원래 지독한 극우보수·반공 주의자였다. 또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적인 시장경제 원칙을 주장하던 공화당 정통파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하루아침에 표변해 중공을 방문하고 미·소 해빙을 가져오고 월남전의 월남화를 꾀하고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채택, 미국 마음대로 「달러」화를 평가절하하고 수입 통제를 한 것은 그의 업적이자 그의 「변덕」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4반세기를 끌어온 냉전 체제를 제거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외교적 공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닉슨」은 전후 미국의 새로운 진보적 외교 기조를 다지는데 공헌했다.
그는 지난60년 고 「존·F·케네디」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2년 후 「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 정치적·망각 지대로 떠나면서 기자 회견을 갖고 다음과 같은 피맺힌 말을 남겼었다. 『이제 여러분이 더 이상 발길질 할 수 있는 「닉슨」은 없어졌습니다·
신사 여러분,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자 회견입니다.』 「닉슨」은 1913년1월9일 「캘리포니아」주 「요버린더」에서 「레먼」농장을 하는 「퀘이커」교도의 집안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이중적인 성격은 평화적인 아버지와 투쟁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생겼다는 「닉슨」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
그는 고향에서 「휘티어」공립학교·「휘티어」대와 「듀크」대학 법과를 졸업, 변호사 개업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FBI(연방수사국)에 지원했으나 마침 그해 모집을 하지 않아 포기했다. 이 시절 그는 「아마추어」연극 공연에서 현 부인 「매트」여사를 만났다.
2차 대전 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복무, 두 차례 훈장까지 받기는 했으나 그의 탁월한 「포커」실력이 병영에서 더 인정을 받았다고.
46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하원의원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이 기간 중 그가 보인 「논쟁 기술」이 인정을 받아 50년에는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또 2년 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39세의 젊은 나이로 8년 동안 부통령직에 재임했다.
부통령 시절 「닉슨」은 「아이크」와병 중 그를 대신해 대통령 일을 보기도 했으며 세계 각국을 순방, 각국 지도자들과 활발한 교제를 벌였다.
지난 53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59년 소련을 방문, 「흐루시초프」와 벌인 『부엌 논쟁』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될 때까지 그는 순탄한 정치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60년 대통령 선거와 62년 주지사 선거에서 연패했을 때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운과 집념에 강했다.
64년 「배리·골드워터」가 「존슨」에게 참패하고 난후 분열 상태에 빠졌던 공화당 재건 작업에 착수, 68년 대통령후보에 다시 지명돼 권토중래했다.
드디어 68년 민주당의 「험프리」와 대결 ①월남전 종식 ②미국 외교정책을 새로 확고히 하고 ③국내 경제의 회복 등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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