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희 진술 못 믿겠다" 김용판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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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 전 청장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됐다. [뉴시스]

“핵심 증거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사건에서 법원이 내린 첫 판단이다. 이 재판은 지난 8개월간 14번의 공판을 거쳐 18명의 증인이 출석하고 5400여 쪽에 달하는 증거가 제출됐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이범균)는 2012년 대선 직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청장에 대해 6일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권 전 과장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핵심 근거로 내세웠다. 검찰은 권 전 과장이 여러 증인 중 유일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권 전 과장은 증인으로 출석해 “2012년 12월 12일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컴퓨터 등을 압수하기 위한 영장을 검찰에 신청하자는 방침을 세웠는데 김 전 청장의 개입으로 이를 보류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권 전 과장을 제외한 다른 수사팀원들과 김기용 전 경찰청장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영장 신청을 보류하게 된 것은 김기용 전 경찰청장의 결단에 따른 것이지 피고인의 지시에 따른 게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이어 “검찰이 혐의 입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다른 권 전 과장의 진술도 통화기록과 어긋나는 등 쉽게 수긍할 수 없다”며 “객관적 사실과 맞고 모순이 없는 다른 증인들의 진술을 모두 믿지 않으면서 권 전 과장만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 전 청장의 지시로 서울청이 수서경찰서가 제출한 키워드 100개를 일부러 축소해 디지털 증거를 분석했다는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키워드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수서서 직원들이 “가급적 키워드가 많이 필요하다고 해서 여직원 2명을 시켜 선거 관련 단어를 모두 추출하게 해 만든 목록”이라며 “리스트에 넣지 않아도 될 키워드가 들어가기도 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수사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서울청의 판단대로 키워드 수를 줄여 분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수사 결과 발표 후 자료를 뒤늦게 넘겨줘 수서서의 수사를 방해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로 봤다. 당시 분석팀들의 상황에 비춰보면 적절한 시점에 자료를 넘겨줬다는 판단에서다. 재판부는 “관련 증거를 종합해 보면 오히려 김 전 청장이 분석의 전 과정을 영상녹화하고 분석 과정에 선관위와 수서서 직원을 참여시키는 등 분석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선고공판 말미에는 검찰의 부실한 수사와 공소제기를 질타하기도 했다. 이범균 부장판사는 “우연과 지엽적인 사실들을 성글게 엮어 틀린 점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를 무시하고 유죄로 판단할 수는 없다”며 “검사의 증명이 의혹과 추측을 넘어 유죄를 확신하게 될 정도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청장에 대한 무죄 판결로 검찰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은 비상이 걸렸다. 현재 같은 재판부에서 진행 중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1심 결과도 자신할 수 없게 됐다. 검찰은 이날 121만 건이었던 국정원 불법 트위터 글 개수를 78만 건으로 줄이기로 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판결문을 받아보고 무죄의 이유가 뭔지 분석한 뒤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현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재직 중인 권 전 과장은 이번 판결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하자 이날 자리를 비웠다.

 민주당은 오후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열어 무죄 판결을 성토했다. 박광온 대변인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만큼 법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판결”이라며 “ 특검만이 답”이라고 주장했다. 트위터를 통해 우원식 최고위원은 “사법부가 타살당했다”고 했고, 박범계 의원도 “ 내가 법조인인 게 부끄럽다”고 썼다. 민주당은 7일 오전 의원총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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