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니힐리즘」의 극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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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던 지난 일요일은 아마도 발이 묶인 전국의 거의 모든 가정이 일요판신문에 보도된 이종대사건의 대단원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화제와 상념 속에 지냈으리라 짐작된다. 전국의 모든 교회에서의 설교가 거의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
물론 흉악·살인강도 이종대·문도석의 자결로 지금까지 미궁에 파묻혔던 일련의 강력범사건은 그 범인이 드러났고 수사도 마무리 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범인은 죽었지만 그 범인을 길러낸 사회환경은 죽지 않고 그대로 엄존해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끝났지만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도록 한 배경은 조금도 변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난 주말의 난동은 결코「화성인의 침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종대·문도석은 바로「우리들 틈에서」나온 것이다. 우리사회의 내부에서 그들을 낳은 것이지 외부로부터 뛰어들어 온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선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해서 결코 망발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이종대 사건을 낳았는가. 제가 쏘아 죽인 자식들에 대해서는 비록 부정의 마지막 따스한 측은의 정을 간직하였으나, 자기를 포위하고 있는 경찰이나, 더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추호도 속죄의 뉘우침 없이 죽어간 범인들.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저 세상에 가서 우리 집 마련해 호화롭게 살자』하고 자결직전에 싸늘한 처자식시체에 유언한 이종대. 그 이종대를 낳고, 그가 자라고, 그가 본 세상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도덕적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 해서 잘못일까.
그는 죽는 마지막순간까지 저를 낳은 아버지를 원망하였으며, 그 아버지는 또 죽어 가는 자식을 보기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든 가치가 전도되고 모든 믿음이 허망한 것으로 퇴색해버린 뒤에도 육친의 따뜻한 사랑을 등에 느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허무와 싸우는 어떤 절대를 찾을 수는 있는 법이다. 그러한 가정을 이종대는 알지 못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을 이와 같이 따스하고 삶의 절대적인 근거로서가 아니라 허무하고 냉랭한 하숙으로 전락시키고있는 집이 어찌 이종대의 생가뿐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를 이러한 가정의 집합이요, 또 그 연장이라 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국가사회 역시 이와 같은 따스한 보살핌, 인명과 양심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부여를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등한시하고 무시하는 풍조를 어찌 그대로 방관할 수 있겠는가.
때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게되는「매스커뮤니케이션」의 시대이다. 그리고 어떤 사치스런 생활도 어떤 특권계층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신분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힘과 기회만 있으면 누구나 어떠한 생활도 누릴 수 있다는 명분 속에 유지되고 있는 세상이다. 한쪽에선 전혀 납득할만한 업적도 이유도 없이 석연 찮은 수단으로 취리 치부한 사람들이 주변머리 없는 사치와 방탕을 모든 사람 앞에 과시하고 있는 판국에, 다른 한편에선 살과 뼈를 깎도록 일을 해도 귀여운 처자식조차 재대로 먹여 살리지 못한 정직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사회정의라는 낱말은 사회적 허무주의의 헛 방귀 소리 이상의 무슨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비근 한 예로 공공의 질서와 관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경찰이 백주 대로에서 차량운전사와 현금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매일매일 눈여겨보고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인들 사회적 허무주의의 감염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그 끔찍했던 이종대 사건이 그래도 무엇인가 계시해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허무주의의 병 독이 얼마나 깊은 데까지 미쳤는가 하는 것을 척결하여 보여준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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