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상 도전사를 통해 본「프로·복싱」 50년의 발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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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홍수환의 세제정상정복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영광이 아니다.
일찌기 김기수가 국내에서 세계정복을 이뤘고 이밖에도 서강일·이창길 등 선배「복서」들이 다져놓은 발판을 딛고 일어선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세계의 두터운 벽에 도전했다 좌절된 선배「복서」들의 집념 어린 도전사가 오늘의 홍수환으로 점화, 한국 「프로·복싱」 50년사에 영광의 결실을 탄생시킨 것이다.
한국「복서」의 세계정상도전효시는 사실상 지금은 잊혀지고 있지만 1930년대 서정권씨(64)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씨는 당시 일제하였지만 미국에서 「리틀·타이거」(작은 호랑이)라는 「링·네임」으로 세계무대를 누볐던 선구자. 그는 「챔피언」제가 없던 당시 WBA의 전신인 NBA세계「밴텀」급 3위까지 부상했던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그는 유명한 「뉴요크·매디슨 스퀘어·가든」「링」에 처음으로 올랐던 동양 최초의 「복서」였으며 약관 19세에서 바퀴 돌리듯 치는 「펀치」는 살인적이라 해서 1세기만에 나오는 천부적「복서」라는 극찬을 받았던 것이다.
기교파로 각광을 받던 서강일이 65년 12월 4일 「필리핀」의 세계「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프라쉬·엘로르데」에 도전한 것이 한국「복서」로서 처음 세계 정상을 공식「노크」한 것.
이 경기는 현 홍수환의 「매니저」김준호씨가 『「게임」에 이기고 판정에 졌다』고 지금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첫 세계 정상「노크」는 너무나 억울한 좌절이 되고 말았다.
이 경기는 당시 RSB(현TBC)에서 현지 중계, 「팬」들이 흥분에 떨었으며 서강일의 판정패로 끝나자 모두 울분을 금하지 못하고 울먹였었다.
이 경기는 「필리핀」 「매스컴」에서도 엉터리 판정이라고 소요를 빚었고 현지에 취재 갔던 중앙일보 현영진 기자는 지금도 『서강일이 「샌드백」처럼 「엘로르데」를 두들겼다』고 술회하고 있다.
하여간 한국철권의 세계정상정복은 첫 도전에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더니 김기수가 66년 6월 5일 당시 세계「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니노·벤베누티」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인 「타이틀·매치」에 성공, 꿈에 그리던 한국철권의 세계왕좌를 탄생시킨 것이다.
집중폭우가 쏟아진 이날 밤 세계「챔피언」을 탄생시킨 장충체육관은 감격과 흥분에 싸인 민족의 밤이었다.
김기수는 그 뒤 2차 방어까지 성공하고 2년 후인 68년 5월 26일 「아탈리아」에 원정, 「마징기」에게 「타이틀」을 넘겨줬다.
김기수의 퇴진 후 한국「프로·복싱」은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안이한 대전만을 거듭, 고작 동양왕좌에 급급하는 침체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다가 지난 3월 3일 이창길이 「콜롬비아」에 원정, 「안토니오·세르반테스」와 세계「주니어·웰터」급 「타이틀·매치」를 가져 김기수 이후 8년만에 정상에 도전했으나 6회 K0패했다. <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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