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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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현 고유섭의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향리인 인천의 자유공원에 있는 시립박물관 정문에「모뉴먼트」를 세운 것이다. 그가 타계한지 30년만의 일이다.
그의 이름은 오늘의 사람들에겐 낮이 설 지도 모른다. 그는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사람이며 또 대중의 기억을 일깨울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순박한 미술사가였다.
그러나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에 유독 그는 한국미술의 찬연한 빛을 찾는 고독한 길을 걷고 있었다. 성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할 때도 유일한 학생이며 유일한 한국인이었지만, 그의 일생도 내내 고독 속에서 끝났다. 하지만 그는 20대에 고도 개성박물관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남모르는 보람을 쌓았다.
우선 그의 인간적인 편모를 한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언젠가 친구가 잉어를 한 마리 잡아왔다. 그는 백지 위에 그 잉어의 탁본을 뜨고는, 그대로 그것을 놓아주었다. 한 술자리에서 우현은 그 백지의 탁본을 매운탕 속에 집어넣고 끓여 내놓더라고 한다. 기인의 행실 같지만, 그 바탕엔 어딘지 덕목이 엿보인다.
우현의 학문적인 식견은 후세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단원 김홍도의 출생 연대를 그는 알려진 연대보다 10년 혹은 15년쯤 앞선 연대로 추정했었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그의 통찰력에서 얻어진 신념이었다.
정말 최근 국립박물관의 한 자료에 의해 단원은 1760년 아닌 1745년 생임을 확인하게되었다.
그의 기념비엔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있지 않다.』
후세의 미술사학자들은 바로 이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미술의 원류를 찾는 한 가설의 설정에서 그것은 훌륭한 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현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을 우리미술의 특질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미술이 곧 우리생활 본능의 양식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표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미술은 감상만을 위한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고, 신앙과 생활의 정치한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한마디로 『구수한 큰 맛』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우리 미술의 본질이 그렇다는 얘기다. 가령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을 보면 굴곡된 목재를 깍지 않은 채 본형 그대로 쓰고 있다. 그것은 순리적인 양식구성의 한 면이다. 따라서 한국미술은 자연적·지리적인 환경의 단아성과 생활태도에서 빚어진 웅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민족성의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시켜준 점에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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