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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다보스 정상회담' 성사 직전 아베 참배로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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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2일 스위스 다보스포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과 대담을 진행했고(왼쪽 사진) 아베 총리는 이 연설을 방청석에서 지켜봤다. [변선구 기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한 지난해 12월 26일 직전 한·일 정상회담이 거의 성사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양국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양국 정부는 현안인 위안부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원칙적 합의 아래 1월 22일 개막하는 다보스포럼에 양국 정상이 참석하는 자리를 이용,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을 조율 중이었다.

 2일 소식통들에 따르면 다보스포럼이 열리는 스위스 현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30분가량의 정상회담을 해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한 뒤 2~3월께 정식으로 한국과 일본 어느 한쪽, 혹은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때 회담을 하는 방안이 추진됐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갑작스러운 야스쿠니 참배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정상회담 장소를 놓고는 직전 회담이 2012년 12월 교토(京都)에서 있었기 때문에 순서상 한국에서 여는 게 맞다는 의견과, 일본이 2003년 이후 11년 만에 국빈 자격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초대하는 게 모양새가 좋다는 의견, 3국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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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앞서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을 위해 최대 현안인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양국 정부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 논의를 시작한다”는 데 사실상 합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 정부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는 입장을 관철하며 정부 간 협상 테이블에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외교소식통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선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사과했던 무라야마 담화(1995년)와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인정했던 고노 담화(93년)를 그대로 승계한다는 일 정부의 입장을 아베 총리가 직접 표명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아베 정권은 그동안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선 각의 결정으로 정해진 만큼 일 정부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고노 담화에 대해선 ‘관방장관 담화’에 불과하다며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데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한·일 정상회담이 물밑에서 적극 추진되기까지는 양국의 긴장이 더 이상 고조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의 입김도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한 고위 소식통은 “미국은 일본에 ‘하루빨리 한·일 정상회담을 하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4월)도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양국(한·일) 지도자가 만나지 못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압력을 비공식적으로 가해왔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일본과의 협상을 수면 아래서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초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의 한·중·일 순방을 전후해 접촉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일 일본을 찾은 바이든 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강하게 요구하자 아베 총리는 ‘우리가 좀 멀리 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바이든 부통령은 이를 ‘우리(일본)가 지나치게 너무 나갔다. 앞으로는 마찰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소식통들은 “이어 5일 한국을 방문한 바이든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의 이런 뜻을 전하자 박 대통령도 ‘일본도 상황인식이 좀 바뀌었구나’란 생각을 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박 대통령도 이후 한·일 정상회담의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한·일 간 물밑 움직임을 챙겼다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움직임과 별개로 아베 총리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갑작스럽게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면서 사실상 양국 간 협상의 판 자체가 깨지고 말았다. 소식통들은 “참배 직전까지 양국의 고위 당국자들이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하던 상황에서 아베가 야스쿠니를 전격 방문한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서울=유지혜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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